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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어째서 나는 천재가 아닌가


*참고: <어째서 나는 천재가 아닌가>하는 물음은 외려 나야말로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에 대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것은ㅡ그러니까 내가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ㅡ부분적으로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에 대한 해명을 위해 쓴 이 글은 때문에 한 편의 일기이자 고백이고 실험노트이자 장황한 역사서술이다. 아이러니컬한 위선적 변호, 치기어린 고뇌의 흔적, 변증법적 진보를 위한 범인의 투쟁, 일말의 진정성을 빙자한 채 횡행하는 자기성찰─이 글이 어떤 식으로 읽히든 나는 아마도 그 해석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모든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비범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의 차이는, 평범한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나는 이 문장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부여된 삶을 살거나, 자신만을 위해 결정된 운명을 타고난 이는 없다.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무언가 다른 것으로부터 파생한 존재다. 우리의 몸짓에는 타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그것은 육체에 새겨진 타인의 영향이며, 그들의 느낌의 결과다


1.

뒤쳐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이따금씩 나의 숨통을 조르곤 한다. 그것은 불현듯 엄습하는 새벽의 밤안개처럼 찾아와 이렇게 속삭인다, 당장 무언 갈 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초라한 낙오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매번의 속삭임은 사형선고가 되어 귓가에 울려 퍼지고 나는 인습의 최면에 걸린 사람이나 불길한 덫에 빠진 산짐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낙오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런 현상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유년시절의 내가 가장 처음 몰두한 것은 살아 움직이는 곤충이었다. 나는 그 시절 곤충학자를 꿈꿨다. 꼼지락거리는 작은 동물들의 예민한 움직임은 나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고 나는 늘 곤충들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사슴벌레와 풍뎅이를 비롯한 수백 마리의 딱정벌레를 사육하며 다지류의 절지동물로 실험을 한 것은 파브르의 탐구정신에 대한 질투와 호기심이 버무려진 욕구불만의 그 무엇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의 관심사는 더 이상 곤충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나는 지독한 게임광이었다. 게임에 있어서도 나는 최고여야했다. 고수와의 레벨 격차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게임을 했고 나는 모 온라인게임의 초고레벨 하이랭커가 되었다. 내가 학살하다시피한 무고한 저레벨 유저들은 나를 욕해댔고 게임을 꽤나 한다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늘 존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화려했던 게임폐인의 역사는 계정이 해킹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게임에 흥미를 잃은 내가 그 다음 몰두한 것은 음악이었다. 쥐꼬리만한 재능이었고 9할이 연습이었지만 음대교수님들과 현직 뮤지션들은 별 볼일 없는 내 연주에 열광했고 관객들은 눈물을 흘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예고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음악 신동이라는 민망한 별명으로 불렸고 음악 선생님들은 알게 모르게 이 수척한 소년의 눈치를 봤다. 음대생들은 고등학생 주제에 교수의 추천으로 대가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고 콩쿨에서 높은 성적을 내는 소년과 말을 섞지 않았다. 낙오에 대한 두려움은 이때도 여전했다. 음악 하던 시절 밤을 새가며 입에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연습했던 이유는 내가 자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는 연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강박적인 생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결과는 뻔했다, 연습과다로 인한 근육부상. 그리하여, 나는 음악을 접고 연필을 집어들게 되었다.

2.

인터넷 활동을 하다보면 줄곧 마주하게 되는 생각이 있다. 이 세상에는 천재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이다. 이 사이버 세계엔 10대 중반인데도 수두룩한 철학 논문들을 읽고 6개 국어를 하는 친구가 있나하면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어린 수학 천재도,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몇 천권의 책들을 리뷰한 사람도 있으며 가히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교수님도, 자신의 논문 몇 백개를 올려놓은 대학원생도 있으며 필력에 있어선 가히 끝판왕급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고백컨대, 이들을 보자면 나는 책상위에 쌓일 때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미세한 먼지조각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름 없는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불가촉천민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들에게마저 넘사벽의 존재가 있으며 그 넘사벽에도 넘사벽의 존재가 있다는 외면하고픈 진실은 나를 지구의 먼지에서 까마득한 우주의 먼지로 격하시킨다. 이 세계의 사회적 유동성에 대한 내가 가진 일말의 희망은 그렇게 연소된다. 마르크스가 역사발전 5단계 설을 통해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환원했다면 나의 역사는 열등감 해소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사회계급의 대립이 농노와 영주,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면 내 열등감의 대상은 파브르에서 게임고수로, 세계정상급 뮤지션들에서 학문적 천재로 이어졌다. 나의 열의는 그런 의미에서 모종의 패배공포증에 의한 부산물에 가깝다. 노자는 하루를 머무는 인생이라는 집에 무얼 그리 집착하는지 자문했지만 패배의 공포는 늘상 나의 게으름을 채찍질했고 하늘의 별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을 때마다 운명은 아무리 틀어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버리는 교활한 물줄기처럼 나를 우롱했다.

언젠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뭇 남성들이 여성의 요염한 육체를 훑는다면 나에게는 지혜가 꼭 그렇다고 말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일종의 공부성애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공부로 스트레스를 푼다던지 그 어떤 유흥거리나 세속적인 오락도 공부만큼의 쾌락을 주지 않는다던지 하는 세미-트랜스 스터디홀릭 상태다. 추측컨대 이러한 공부성애는 세상에서 날고기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에너지로 변환시켜서 천재들의 발끝에라도 닿아보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의 산물이거나 적어도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용이한ㅡ공부성애같은ㅡ모종의 심적 조건들을 갖는 상태로 진화한 나의 뇌구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부성애의 발현경위는 자연발생보다는 후술할 천재-암시 실험의 결과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3.

감정은 왕왕 강력한 추동력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일시적일뿐더러 지속적인 추동력으로 이어질 만큼 강하지 않다. 이를테면 전구를 밝히는 전기에너지가 불필요한 열에너지로 소모되듯이 대부분의 감정은 정신의 외피를 타고 흐르다 그대로 증발해버린다. 양자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열역학 제1법칙의 대전제가 명시하듯 고립계 내의 에너지총합이 일정한 반면 한 번 소모된 감정은 보존되지도, 변환되지도 않는다는 것 정도.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나는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의 추동력을 생산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계획은 간단했다. 낙오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회피동기와 천재열망으로 발현되는 접근동기를 동시에 트리거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단기적인 목표달성에 최적화된 이러한 외재적 동기화(extrinsic motivation)를 추동하는 스티뮬러스를 끊임없이 줌으로써 정신에 일종의 풀무질을 가하는 것. 이때 외재적 동기화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자기실현적 예언이 첨가된 천재-암시와 인공적인 외부인풋을 이용함으로서 접근동기와 내재적 동기화(intrinsic motivation)를 무의식상에서 엮기만 한다면 나는 이제까지 나를 옥죄던 열등감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를 위해 강한 추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감정을 찾아야했고, 그 후 그 감정을 방향성을 지닌 심적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법을 찾아야했다.

감정은 벡터값을 갖는 에너지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물리학적 의미로서의 에너지는 아니다. 그저 개인을 통해 특정한 행위를 하게끔 추동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거나 또는 특정한 동기를 몇 배로 부풀릴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예컨대 연인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없다면 할 수 없었을 용감한 행동을 가능케 하며 증오심은 상대를 파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특정 감정 E의 상대적 강도를 실수(R)로 취급하고 감정 E의 강도를 <E를 통해 사용가능한 심적 에너지의 총합>으로 정의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E의 강도를 0부터 100사이의 스케일로 표현할 때, 증오감의 정도가 10이라면 그저 흘겨보는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겠지만 증오감의 정도가 90이라면 그것은 타인을 살해하는 데에 충분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말하는 감정의 에너지는 감정의 강도(intensity)와 비례하며 감정의 빈도(frequency)와도 유관하다. 여기서 강도와 빈도 중 더 큰 영향력을 갖는 변수가 전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설령 그것이 단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자신의 자아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크기의 감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햄릿』의 오필리아와 『오이디푸스왕』의 이오카스테처럼 감정에 압도당한 정신은 자아가 방어기제를 만들어 낼 틈도 없이 붕괴돼버리기 때문이다. 요컨대 강도가 높다면 빈도가 낮아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강도가 낮다면 빈도가 높아도 전자만큼의 추동성을 갖진 않는다. 에너지원으로 가장 적합한 감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빈도도 높고 강도도 높은 열등감이었다. 살리에리 증후군, 열등 콤플렉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상태─무엇으로 부르던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없애고 팠던 열등감이었으니 무의식을 최대한 이용해먹기로 작정했다.

4.

열등감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자신보다 나은, 또는 자신보다 나아보이는 비교대상이 존재해야만 발동된다. 그 비교대상이 가상의 캐릭터인지 실존하는 인물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그저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열등감은 세 가지의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기파괴적인 퇴보(-의 상태), 자포자기적 정체(0 혹은 –의 상태), 그리고 생산적인 완벽주의를 통한 발전(+의 상태). 나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대상의 존재>라는 인풋을 통해 자괴감도 자포자기도 아닌, 리처드 윈터가 곧잘 말하는 <건강한 완벽주의>라는 아웃풋에 도달해야 했다. 건강한 완벽주의도, 자괴감도, 자포자기도 전부 나의 한계에 대한 인정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은 열등감의 디폴트 방향성 설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똑같은 <난 멍청해>도 <그러므로 노력해야해>와 <그러니깐 난 안 될 거야>로 나뉘는 것처럼.

후자의 아웃풋을 막고 전자의 아웃풋을 트리거하기 위해 나는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는 상태에서 나의 발전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막상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자칫 발전가능성을 무시해버린다면 나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프레임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 발전가능성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었다. 내가 좌우간 살아있는 이상 나에게는 퇴보가능성과 발전가능성이 언제나 공존하며 이는 나의 노력은 물론 사회적 변수와 다른 여타의 심리학적, 생물학적 변수의 총합에 종속적이다. 내가 그 어떤 지옥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내가 아무리 멍청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백치라 생각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 기억해도 발전가능성에 대한 자기암시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자괴감의 나락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띠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 프로토콜을 짜며 좀 더 효과적인 대비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안전띠만으로는 부족했다. 열등감이라는 강력한 감정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선 그에 맞먹는 강한 맞불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안해낸 장치가 나의 암시와 외부적 피드백으로 발동되는 우월-메커니즘이었다. 인간은 우월감에 약하다. 자신은 청렴결백하리라 외치던 모든 사람들이 조금의 권력 맛으로도 십중팔구 무너지는 데엔 이유가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열등감에 약하다는 건 그만큼 우월감에 약하다는 소리다, 어느 쪽이던 타인과의 비교가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수용할 때만 가능한 감정 상태니깐.


5.

열등감은 충분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손에 닿을 듯이 선명한 목적지였다. 목표는 단연 하나였다─천재, 그리고 천재!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천재라는 이름의 미끼를 낚싯줄에 걸어 열등감의 코앞에 들이대면 열등감의 방향성은 결정될 터였다. 한 손엔 낙오의 두려움(Timor deficiendi)이라는 채찍을, 다른 손에는 천재로의 열망(Desiderium ad esse ingenium)이라는 당근을 들고 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월감이라는 맞불을 놨다. 나는 천재여야만 했다. 나는 비범해야만 했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들을 생각해내는 넘사벽의 브레인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만 했고 모든 주제에 대해 능통한 르네상스인이 되어야만 했다. 기대치와 현실치는 특정 임계점 내에서 강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나에 대한 기대치를 올리는 순간부터 나는 천재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천재 코스프레를 하다간 영락없이 현재에 만족한 채 나르시시즘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런 헛똑똑이들과 달랐다. 다른 헛똑똑이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헛똑똑이였다면 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는 헛똑똑이였다. 나는 평범한 범인들의 카타콤에서 벗어나 비범한 동굴 밖 존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싶었다.

드웩의 점증이론(Incremental theory)과 독립체 이론(Entity theory)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똑똑해지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멍청해진다. 로젠탈과 제이콥슨의 아이큐테스트가 유명한 케이스다. 실험은 거의 완벽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인지적 불평형 상태를 유지함으로서 최적각성수준의 상태를 이끌어냈고 토니 부잔의 듀얼코딩과 바이오피드백을 응용해 만들어낸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코딩방식을 통해 해마에 인코딩되는 모든 기억정보의 회상도를 인위적으로 증폭시켰다. 나는 천재 암시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 (무의미한 인풋→유의미한 아웃풋)를 통해 실제로 똑똑해지기 시작했으며 나에겐 눈엣가시 같았던 <똑똑해 보이고픈 인정투쟁>을 역이용해 어떻게 하면 똑똑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동시에 인지적 훈련과 인지능력상승에 정비례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Jaeggi의 연구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함으로서 두뇌활동을 최적화시켰고 슈와츠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 실험의 일환이되는 모든 활동의 성취감을 증폭시켰다. 줄리의 법칙은 적어도 나에겐 정확했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고맙게도 나의 천재성을 인정해주었고 이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겐 일종의 프레임과 자기실현적 예언으로써, 한편으로는 포지티브 피드백의 일환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수록 나의 천재성에 대한 나의 거짓 믿음은 강화되었고 나는 그런 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부합하기 위한 노예적인 인정욕구를 또다시 계획적으로 역이용함으로써 그만큼 노력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평균이상효과에 호손효과라는 양념을 치고 선플의 플라시보와 악플의 노시보 양극단의 피드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나는 더더욱 똑똑함에 점근해갔다. 내가 헛똑똑이라도 문제는 없었다. 가면증후군으로 인한 내적 갈등은 나에겐 어차피 상수다. 내가 멍청한 만큼 나는 현실과 기대의 괴리로 인해 더 큰 좌절감을 맛볼 것이고 더 큰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낄수록 에너지원인 열등감은 선형적으로 증폭될 테니 큰 문제는 없었다. 기본적인 좌절효과의 응용이다.

이런 정신 상태에서 우월감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숙적이었다. 내가 놓은 맞불은 열등감을 제어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은 기실 스스로 또 다른 문젯거리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열등감의 위험성이 자괴감에 있다면 우월감의 위험성은 나르시시즘에 있다. 전자는 자기 파괴의 위험, 후자는 현실에 안주하는 정신승리의 위험. 결국 나에게 있어서 열등감을 통한 정체와 우월감을 통한 정체에는 큰 차이가 없는 셈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의 천재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한 손가락으로도 나의 치기어린 도전을 가볍게 짓뭉갤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존재들이 필요했다. 대표적으로 B씨와 K교수님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나는 성장했다. 오래전 K교수님의 비판에 무참히 밟히던 나는 3년 후 교수님의 공격을 두 팔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단지, 압도적인 존재들과의 대면을 통해 열등감을 트리거한다고 해서 우월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열등감을 야기하는 사람들의 집합 P와 우월감을 야기하는 사람들의 집합 Q에서 아무런 교집합적 요소도 찾을 수 없다면 나의 무의식은 좀 더 용이하게 집합 P에 속하는 사람들과 Q에 속하는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을 테고 따라서 P의 사람들에게는 비굴한 태도를, Q의 사람들에게는 깔보는 태도를 갖고 있는 『레미제라블』의 테나르디에나 『쿠오바디스』의 킬로, 혹은 『일리아스』의 니오베 같은 속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내가 멍청하다는 믿음과 내가 천재라는 일견 모순돼 보이는 믿음을 둘 다 갖고 있는 상태에서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중간지점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런 지점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스스로 함몰해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열등감은 자기파괴로, 지나친 우월감은 자기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에너지원으로 충분하되 파괴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선에서 그치는 열등감>과 <방향을 확실히 잡아주되 정체로 이어지지 않는 선에서 그치는 우월감>이 필요했다. 어느 쪽이건, 나는 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두 얼굴의 맹수를 양육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정신이 우월감에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임시적으로 고안한 방안은 뛰어난 존재를 맞닥뜨릴 때 트리거 되는 열등감의 강력한 감정으로 우월감을 상쇄시키는 열등-메커니즘이었다. 전술했듯 열등감은 우월감을 없애진 못한다. 그러나 열등감이 충분히 강하다면 그것은 기존의 우월감을 덮어버릴 수는 있다. 주의(attention)의 특징은 분산될수록 집중력이 하락한다는 것이므로, 무의식이 응시하고 있는 기존의 대상(감정 P₁)을 다른 대상(감정 P₂)으로 교체하기만 한다면 나는 인풋 P₁을 통한 아웃풋 C₁을 무력화ㅡ즉 일시적으로나마 P₁을 내 정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감정으로 치환ㅡ시키고 인풋 P₂를 통해 아웃풋 C₂를 유도함으로써 C₁의 의식적 부작용을 효과적으로 상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이 임시적인 해결방안엔 사실 문제가 있었다. 나는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열등감에 휩싸여있거나 우월감에 도취돼 있거나 두 가지의 정신 상태밖에 없는 듯한 생활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해결방안이 필요했다. 나는 분명 언제나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때는 우월감을 느끼지 못했고 우월감을 느낄 때는 열등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다시 말해 전자의 경우에선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이 비교 대상이 되는 샘플 전체에서 제외되며 후자의 경우에선 나보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비교대상에서 어떤 이유로건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열등감은 집합 Q-배타적, 우월감은 집합 P-배타적인 비교대상에 의존적인 셈. 만약 인간이라는 전체집합에서 집합 P에 속하는 특정 샘플들이 제외되어야 우월감을 느낄 수 있고 집합 Q에 속하는 샘플들이 무의식적 기제에 의해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어야만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학문적 우열계산 과정 그 자체에서 <특정 샘플들을 제외하는 의도적인 실수>를 하지만 않는다면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바를 의미했다. 고려대상이 되는 샘플의 의식적 확장을 통해 열등감과 우월감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르시시즘과 타인에 대한 경멸로 소진되곤 하는 우월감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여 나는 열등-메커니즘을 통해 의식수준에서 우월감을 은폐한 후, <비교대상을 Q로 한정 짓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무의식에 각인이 된다는 점>을 이용하는 동시에 우월감의 달콤함과 지식섭렵에 대한 달콤함을 엮었다. 나는 요컨대:


지식섭렵(x)→칭찬(y)→인정욕구/열등감해소(z)


라는 무한 연쇄적 3항 관계식에 나를 노출시킴으로서 아웃풋 z의 쾌감을 내적 인풋 x와 외적인풋 y에 의존적으로 만들었다. 인풋 y가 무조건 자극(US)이고 그에 따른 쾌감이 무조건 반응(UR)이라면 나는 인풋 y의 필요조건을 x로 상정함으로서 뉴트럴 스티뮬러스에 불과한 기존의 x변항을 조건자극(CS)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조건화하는데 성공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에 등장하는ㅡ전기신호가 주는 쾌락에 중독된ㅡ생쥐처럼 공부라는 단일한 활동으로 시상하부와 대뇌측좌핵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대뇌변연계 자극을 통해 트리거한 아웃풋 z로의 접근동기와 패배로부터의 병적기피로 발현되는 회피동기가 나를 강하게 떠밀었다. 이내 열등감을 연료로 하는 육중한 무한동력장치가 가동되었다. 아마도 그렇게, 공부성애는 시작됐다.

6.

천재 코스프레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기대치가 현실치에 미치는 영향을 믿고 있고 무엇보다 직접 그 혜택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부작용이 있을 순 있다. 글에서 자주 드러나는 잘난 척은 과거 지독하게 걸었던 암시의 일환으로서의 우월-메커니즘으로 인한 무의식적 여파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하고 있는 천재 코스프레의 의식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두려웠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점차 괴물로 변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자기검열과 자기객관화로도 온전히 걸러낼 수 없는, 무의식 깊숙이 침전해있는 어떤 알 수 없는 욕망에게 집어삼켜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나는 그래서 강박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난 척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천재 암시를 했고 부지중에 고름처럼 흘러나오는 우월의식에 혐오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또다시 공부의 추동력으로 되새김질했다. 한 번의 잘난 척은 한 줌의 구토감섞인 수치심을, 수치심은 자격지심을 낳으며 부족함에 대한 강한 반발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 어디서 잘난 척을 했고 어떤 글의 몇 문단에서 불필요한 우월감에 도취됐는지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우월감에 도취될 때의 사이버랭귀지와 그렇지 않을 때의 사이버랭귀지를 알고 있고 의식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에서의 우월감으로 작성한 문장과 의식적으로 제어가능하지 않은 수준에서의 우월감으로 작성한 문장의 차이도 알고 있다. 우월감이라는 흉측한 페르소나는 마치 그림자처럼 문장의 이면에 스며들었고 초자아라는 이름의 자기검열적 판옵티콘은 그런 감염된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자괴감의 형벌로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래도 천재를 갈망했다. 나도 안다. 이 모든 시도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천재가 될 수 없으리라는 모종의 공포감에서 기인하는 강박의 결과물이다. 나는 나를 불신하고 있는 것이다. 곤충채집을 할 때도, 게임을 할 때도, 음악을 할 때도 나는 나를 불신했고 글을 쓸 때도 나는 나를 믿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불신은 어쩌면 신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다. 믿는 척은 했으나 정작 걸어 나가야 할 때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의 근본을 좇았지만 그의 에피그램은 단 한 번도 온전히 체화되지 못했다. 그래, 나는 그래도 천재를 갈망했다. 그렇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라는 타이틀은ㅡ그러한 단칭명사로 엄격히 카테고리화해 묶을 수 있는 집단이 좌우간 존재한다면ㅡ폰노이만이나 그로티우스나 갈루아나 크립키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린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천재를 갈망하는가? 줄곧 볼품없는 현실에서 빛나는 미래를 뒤적여온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열등감과 인정욕구는 근본적인 동인이 아니다. 전자는 원인에 대한 어떤 결과물에 불과하고 후자의 충족은 천재에 대한 갈망의 해소를 함축하지 않는다. 나는 천재가 됨으로서 얻을 수 있는 부귀와 명예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재의 천재임을 살아내고 싶다. 에베레스트에 깃발을 꽂아 넣는 몽상가처럼 장렬하게, 손가락 끝으로 점자를 읽어내는 눈먼 암호해독가들처럼 선명하게, 나는 거의 무한하게 확장된 세계-내-존재자의 비범한 관조적 정신이고 싶다. 4차원의 시공간이 눈앞에서 이론적으로 재조립되고 능동적으로 분석되는 경험, 거대한 우주를 메꾸고 있는 복잡다난한 현상들의 기저에 자리잡은 패턴이 직관적으로 파악되고 병렬적으로 수리화되는 경험, 물리적인 감각소여를 수용한 시신경 세포가 초당 천만 바이트의 정보를 트랜스덕트하는 미시적 과정을 육감으로 감지해낼 수 있을만큼의 인지적 예리함을 고대하며 전하를 띠는 유동적인 원자들의 집적물에 불과한 사물들이 유클리드 평면 위의 기하학적 도형으로 환원되고 추상적 사고의 무형성이 유형성을 갖는 구체적인 문장으로 탈바꿈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의식의 손가락으로 쓸어넘겨 보고 싶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갈망하는 것이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비범하지도 않고 천재도 아니다. 그래봐야 공상의 산물인 낙오의 두려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확연한 평범함의 징표다. 열등감. 고작 이 단어 하나만으로, 단지 이것만으로도 요약되는 인생이다. 그 정도로 평범한 인생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천재에 점근하고자 분투할 것이다. 그 노력의 종점이 진정한 천재가 아니라면 나는 애초부터 고작 그 정도의 그릇에 불과한 소인이었거나 나의 분수에 알맞은 다른 일을 찾으라는 신의 뜻일 게다. 오토 바이닝거와 비트겐슈타인처럼 천재가 아니면 안 된다는 태도는 결국 나에게 암시라는 틀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 천재면 천재고 아니면 아니다. 그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열등감도 아니고 합리화도 두려움도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빌어먹을 천재가 무엇이고 천재의 천재임이라는 그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닿는 것이 진정 불가능한지 시험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반증하기 위하여 혹은 이를 스스로 입증해 보이기 위하여, 아니 나조차 천재가 될 수 있다면 천재는 그야말로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며 내가 공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는 모든 지점들을 방어해낼 것이다. 나는 고작 20살에 불과한 애송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에 다름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문장을 정제해 나갈 것이며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핵심을 파고들 것이다. 이는 까마득한 곳에서 범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짜 천재들에 대한 나의 노예적인 발악이자 우물에서 기어 나오고자 발버둥치는 한 듣보잡 개구리의 히스테리컬한 솔리로퀴다. 내 위에서 날고기는 수천만의 천재들보다 더 날카롭게 칼을 갈아야하는 이유는, 내가 백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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