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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l 15. 2017

의식적 경험과 기능적 설명

차머스의 자연주의적 이원론, 그리고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설명적 한계

1.의식적 경험(conscious experience)은 해명될 수 있는가? 애초에 의식은 무엇인가? 지각과 습득, 기억과 인지같은 의식적 활동은 기능적으로 정의(functionally define) 될 수 있다. 이는 말하자면 이러한 의식적 활동이 일련의 물리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진술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의식적 경험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빨강색에 대한 지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사되는지 생물학적으로 비교적 정교히 서술할 수 있지만 시각적 경험 그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은 생물학에 메타적인 논의를 요한다. 그것은 외려 신경생리적, 생화학적 해명에 독립적이다. 시각적 감각소여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체에서 반사되는 전자기적 파동이 가시광선의 형태로 망막을 자극하면 광수용체들은 이를 하나의 전기신호로 트랜스덕트에 시신경과 시상으로 보내고 시상에서 프로세싱된 전기신호는 후두엽에 도달한다. 그렇게 도달한 전기화학적 신호는 Ventral stream을 통해 물체인식을 담당하는 측두엽을, 그리고 Dorsal stream을 통해 물체에 대한 육체적 운동을 담당하는 두정엽을 자극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3D 이미지에 대한 의식적 경험을 하게된다. 그렇다면 이 의식적 경험은 결국 이미지에 대한 지각을 가능케하는 모종의 기계적인 두뇌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은가? 아니다. 차머스가 지적하듯 의식적 경험은 기능적 인식(functional awareness)을 동반하지만 자극에 대한 단순한 생리적 반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는 기능적 인식을 가능케하는 물리적 조건들은 의식적 경험의 필요조건일 순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때문에 의식적 경험과 기능적 인식 사이엔 종래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해명될 수 없는 설명적 간격(explanatory gap)이 존재한다. 이미지나 음파같은 스티뮬러스가 어떤 식으로 지각되는지에 대해선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시각적 경험이나 청각적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선 부가적인 해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차머스는 실증적 연구와 귀납적 지식에 중점을 두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기능적 인식 내지 감각적 지각의 조건들을 해명하는 데만 최적화돼 있다고 지적한다. <The subjective state of play, of pain, of pleasure, of seeing blue, of smelling a rose─there seems to be a huge jump between the materialistic level, of explaining molecules and neurons, and the subjective level>이라는 Koch의 지적역시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머스나 레빈이 말하는 설명적 간격은 자연과학으로 해명될 수 없는 것인가? 데넷은 의식적 경험을 두뇌의 전기화학작용에서 비롯되는 어떤 자연주의적 부산물로 본다. 자연주의적 환원을 통한 의식적 경험의 해명가능성은 과학이 발전해감에 따라 선형적으로 상승해가리라는 것이다. 허나 의식적 경험을 해명하고자한 종래의 자연과학적 시도를 고려할 때 데넷의 주장엔 설득력이 있는가? Crick과 Koch의 <의식에 대한 신경생물학적 가설>도, 종국엔 인지적 파악가능성(cognitive accessibility)을 다루는 데서 그치는 Baar의 인지모델도, 감각적 지각을 설명하는 Edelman의 뉴럴다위니즘 모델도, 데넷의 Multiple drafts 모델과 Jackendoff의 Intermediate level가설도 설명적 간격을 온전히 해명할 수 없다는 문제를 갖는다.

차머스에 따르면 자연과학으로 의식적 경험을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형태가 존재한다: (1) 의식적 경험에 대한 자연과학적 해명가능성을 포기하고 물리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만을 해명하는 입장, (2) 데넷, 올포트와 윌크스가 주장하듯 의식을 물리적, 기능적으로 해명하는 순간 의식적 경험의 해명필요성은 사라진다는, 독자적인 현상으로서의 의식적 경험을 부정하는 입장 (3) Flohr와 Humphrey처럼 특정 모델을 통해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적 경험을 해명하고자 하는 입장, (4) 의식에 대한 구조적 해명을 통해 경험의 구조적 측면을 비환원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 (5) 두뇌작용에 의해 의식적 경험이 발생한다는 데 착안, 어떤 두뇌작용이 경험을 가능케 하는지 해명하고자 하는 입장. (1)은 선술한 이유로 부적절하며 (5)는 어떤 두뇌작용이 경험을 가능케 한다면 그 두뇌작용이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현상으로서의 경험을 가능케하는지에 대한 부가적인 해명을 필요로 한다. (2)는 의식적 경험에 대한 물리적 환원주의를 통해 경험의 해명필요성을 소거시키긴 하지만 사실상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3)은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델들 중 <설명적 간격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낼 수 있는 모델이 없다. 마지막으로 경험의 구조적 측면에 대한 해명을 통해 의식을 설명해내고자 하는 (4)의 시도는 경험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경험의 어떤 속성에 대한 해명에서 그친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차머스에 따르면 이중 그 어느것도 의식적 경험을 만족스럽게 해명해낼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해답은─그 해답이라는 것이 좌우간 존재한다면─종래의 인지과학적 담론과 신경과학적 리서치에서가 아닌 그 외부에 존재해야 한다. 첫 번째 후보는 Penrose가 20세기 후반부터 주장한 비알고리즘적 프로세싱(nonalgorithmic processing) 모델이다. 안타깝게도 비알고리즘적 프로세싱 모델은 분명 두뇌의 의식적인 수리적 활동과 연산능력을 설명해낼 수 있기는 하지만 두뇌의 비알고리즘적 프로세싱을 전부 해명할 수 있다 해도 그 해명은 두뇌의 연산작용에 대한 어떤 기능적 해명 이상이 될 수 없다. 두 번째 후보는 인지작용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비선형역학과 카오스 역학이다. 허나 차머스 역시 지적하듯 역학은 역학이므로 이들 역시 종국엔 특정 변항들의 인과관계에 대한 기능적 해명을 다루는 데에 그칠 뿐이고 세 번째 후보인─그리고 아마 데넷이 지지할 법한─미래의 신경생리학 리서치를 통한 문제해결 역시 (1)과 동일한 이유로 부정된다.


그 다음 후보는 의식에 대한 양자이론이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소립자는 불확정성(nondeterminism)과 비국소성(nonlocality)을 갖는다. 그러므로 두뇌의 인지과정이 갖는 임의성은 어쩌면 양자이론을 통해 해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여타의 계산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경험의 발생을 해명할 수 있다고 보기엔 소립자와 경험의 관계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불충분하다. 차머스는 이 때문에 데넷과는 달리 의식적 경험에 대한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모든 자연주의적 해명은 경험-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자연주의적 해명이 경험-독립적이라면 특정한 물리적 조건들에 의해 경험 그 자체가 발생해야만 하는─혹은 수반돼야만 하는─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경험의 창발이 어떻게, 어째서 왜 가능한지에 대한 메타적 해명이 필요하다. 허나 경험은 물리적, 객관적으로 관측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적이며 주관적으로만 느껴지는 현상일 뿐이다. 설명적 간격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종래의 자연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경험은 자연주의적으로 창발될 순 있지만 자연주의적으로 해명될 순 없기 때문이다.

2.차머스는 의식적 경험에 대한 비환원주의를 지지한다. 허나 그는 동시에 의식이 탈자연주의적인 어떤 신비적인 현상보다는 하나의 물리적인 기본 요소(fundamental element)로 간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질량이나 원자가 어째서 존재하는지, 공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는 묻지 않듯이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차머스는 자연주의적 이원론자에 가깝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 요소로서의 의식적 경험의 공리화(axiomatization)엔 사실상 별다른 근거가 없지 않은가? 의식적 경험이 시공간이나 질량 같은 엄연한 물리학적 개념의 일종으로 취급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럴싸한 지적이다. 의식적 경험에 대한 환원주의적 스탠스를 견지하는 데넷은 의식적 경험이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기본 요소일 수 있다는 차머스의 가정에 반대하며 경험을 기능적으로 환원한다. 두뇌의 작동 메커니즘과 정보처리 방식에 대한 몇 가지의 기능적 해명을 발굴한다면 사실상 설명되어야하는 경험이란 소거된다는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한다면 <의식적 경험은 기능적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의식에 대한 기능적 해명에 성공한다는 것은 곧 경험에 대한 해명에 성공하는 것>이라는 데넷의 근거는 무엇인가? 기능적 해명은 경험에 대한 충분한 해명인가? 그것이 경험의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차머스는 데넷의 논증이 순환적이라고 지적한다. 의식적 경험에 x와 y라는 필요조건이 있다고해서 x와 y가 의식적 경험의 충분조건이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데넷이 설명하는 기능적 해명은 의식적 경험을 가능케하는 어떤 조건들을 설명해낼 순 있어도 의식적 경험을 창발케 하는 전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그리고 더나아가 의식적 경험을 창발케하는 조건이 전부 기능적 해명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기능적 해명에 독립적인 현상으로서의 경험의 존재 근거를 제시하라>는 데넷의 반론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현상으로서의 경험의 존재 근거가 불명확하거나 알 수 없다 해서 <모든 현상으로서의 경험은 기능적 해명에 종속적이다>는 결론이나 <기능적 해명에 독립적인 경험은 없다>는 결론은 연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머스는 이 때문에 데넷의 반론이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 의식적 경험은 그 존재 근거를 통해 정당화되어야만 성립하는 대상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그러니까 실재하기 때문에 설명되어야하는 현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차머스가 지지하는 <기본요소로의 의식적 경험의 공리화>는 결국 단순한 기능적 해명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의식적 경험의 특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결되는 대전제로 볼 수 있다. 하여 기능적 해명에 독립적인 현상으로서의 의식적 경험에 대한 회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나 다를바없는 층위의 작업으로 격하된다. 세계의 존재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세계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듯이 의식적 경험의 존재 근거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식적 경험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의식적 경험의 존재를 부정하는 비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차머스의 공리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의식적 경험의 해명에 충분조건이 되는 기능적 해명의 집합 Γ와 그 원소들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요구될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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