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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Mar 29. 2024

왜 하필 피아노야

류마티스라면서

피아노를 시작한 건 만 4살이었다.


동네에서 호랑이 원장 선생님으로 이름이 나 있던 엄마는 나를 가르치며 자주 속 터져했다. 피아노 앞에서 머리채를 수없이 잡히는동안, 우아하게 배워야할 것 같은 음악을 파이팅 넘치게 배우다보니 피아노만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무거워졌고, 무엇보다 싫었다.


학교 가기 전에 꼭 피아노 연습을 시키던 엄마를 피하고 싶어 주번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일찍 학교를 가곤 했다. 터벅터벅 학교를 향해 걸으며 오늘은 무사히 넘겼다고 안도하던 시절이었다.


신의 한 수였을까. 엄마도 더 이상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식은 가르치지 못하겠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를 다른 피아노 학원으로 보냈다.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들끼리 협회도 있고 했는데, 그중 나보다 2살이 많고 피아노를 무척 잘 치는 첫째 딸이 있는 선생님의 학원이었다.


선생님은 자주 농담을 던지며 잔뜩 굳어있는 나를 풀어주곤 했다. 덕분에 많이 웃었고 마음도 덩달아 서서히 편안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덩치만 컸지 아이였다. 고작 만 9살 10살이었을테니. 피아노를 치는 일이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즐거워졌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버스를 타고 혼자 학원에 가서 문 닫을 때 선생님 차를 타고 왔다. 물론, 또래 언니들이 함께 재미있게 놀아주기도 했고, 선생님이 사 주시는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 떠는 시간도 빨리 흘렀다. 작은 놀이터와 같은 그곳에서, 피아노는 금세 초등학생인 나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새로운 선생님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4학년 봄, 처음으로 학교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피아노 잘 치는 아이라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좋았다.


피아노 선생님은 예술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딸이 교수님께 배워온 입시곡을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어 했다. 건너편에서 언니가 연습하던 쇼팽 에튀드 4번을 들으며 참 멋진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이제 그 곡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는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았다.


그 후로 쭉쭉, 선생님의 딸을 따라서 예술 중학교 입시를 치를 것처럼 준비했다. 스케일 이름을 부르면 바로바로 칠 수 있어야 하고, 곡도 다양하게 배웠다.


마침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입시 시험을 쳐 보겠냐고 묻던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까지 밀어줄 돈이 없다고 했다. 피아노는 취미가 낫지 않겠냐며 공부를 하라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면 이미 다 스스로 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렇게 클 동안 피아노로 이름 날리는 천재도 아니라는 접점을 찾아 나는 (현명하게)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난데없지만, 후회한 적도 딱히 없이 시간이 지나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는 내게, 어느 날 엄마는 말한다. 니가 음악성이 그렇게 뛰어나거나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건 아니었어. 내가 그걸 알아봤지.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음악가로서 꿈을 이루지 못한 비련의 주인공 같은 이야기는 아니니 안심하시라.


다만 어렸지만 피아노였든 공부였든 한국 밖의 세상에서 배워보고 싶었던 나의 열망을 지지해 주기에 형편 넉넉지 않았고, 그저 한국에 딱 붙어 보통의 삶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간을 관통하는 동안 취미로 치는 피아노는 종종 정신을 환기시켜 주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선생님 학원에서 눌러앉아 하루 종일 연습하고 놀던 생활도 사실은 다 시간이 허락하니 가능한 행운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피아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고, 그나마 초등학생 때 낙낙한 시간 덕분에 누릴 수 있던 곡들을 향후 대학 졸업까지 생각날 때면 야금야금 우려먹으며 뚱땅거렸다.


그마저도 잘 못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채로. 어쩐 일인지 보통의 삶을 향해 열차게 달리면서도 보통의 건강은 쏙 빼놓고 생각했다. 건강해야 취미로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피아노 연습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립니다 @piano.autum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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