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우는 아이를 이웃집 여자가 봤다
부끄러운 엄마 반성문
그것도 아이와 같은 학교 다니는, 같은 학년 아이 엄마가.
아랫집이 이사 온 지는 이제 한 3개월 좀 넘어가나 보다. 누군가 매입해 놓고 한동안 비어있어 도대체 누가 주인인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 온 가족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아이 학교에서 오며 가며 보던 그 엄마가 아닌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먼저 앞섰던 건 사교성이 부족한 성격 탓이었을까, 그저 나이 먹어 생긴 노파심 때문이었을까.
괜히 더 신경이 쓰인다. 자주 물병이고 장난감이고 떨어뜨리는 세 살 반 둘째에게 곧잘 주의를 주었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렸던 건지 우리집 강아지가 난데없이 발코니로 뛰어 나가서 짖을 때면 그것도 미안하고, 일단 달려가는 강아지를 멈춰보겠다고 힘차게 불렀던 목소리가 또 너무 컸을까 싶어서 신경이 쓰인다.
부활절 즈음 초콜릿을 가져다주러 왕래한 것 말고는 딱히 아직까지 왕래는 없다.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데면데면 지내겠지.
오늘따라 6살 아이의 등교 준비가 늦다. 교복 입어라, 아침 먹어라, 점퍼 입어라. 날은 추워지는데 자꾸 반팔만 입고 학교 가려는 아이에게 좀 따뜻하게 입고 학교 갔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카디건도 있으나 사두고 한 번도 입지 않고, 그나마 점퍼는 입으니 그거라도 입고 가라는데 버티기 시전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장실에 큰 볼일을 보러 가야겠단다. 그래 다녀와. 아무래도 학교에서 가는 것 보다야 자기 마음도 편하겠지 싶어 한숨 크게 들이쉬고 대답했다. 문제는 아이가 남편 닮아서 화장실만 들어갔다고 하면 감감무소식이라는 것. 우리 집 남자들은 왜 이렇게 화장실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는 건지.
이제 그만 나와!!!
기다리다 기다리다 터지고야 말았다. 언성을 높여버리고야 말았다.
아직 양치도 하지 않았고, 점퍼도 입지 않았고, 도시락도 가방에 넣지 않아 내가 챙겨준 후였다. 나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만 천하태평이다.
양치도 하는 둥 마는 둥, 그 와중에 치약을 교복 셔츠에 똑 떨어뜨린다. 치약 그거 물로 닦아내고!!
도대체 어디에 치약이 묻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아이. 결국은 내가 다시 아이를 세면대로 데리고 가 물로 그 부분을 닦아내며 빨리 신발 신으라고 재촉한 후, 그 사이 점퍼를 겨우 입혔다.
아이가 문 앞에서 울음이 터졌다.
이럴 시간 없어. 가야 돼. 빨리빨리.
누가 아침을 이렇게 시작하고 싶겠는가. 달래주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매몰차게 이럴 시간이 없다고 말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찰나지만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랫집 여자가 마침 디올백과 함께 곱게 차려입고 나서는 길이다. 두 눈이 벌건 우리 집 아이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인지 묻는다.
준비가 너무 늦어져서요. 그 집 아이들은요? (이 집은 작은 아이가 우리 집 큰 아이와 같은 학년이다)
이미 남편이 차로 아이들을 학교로 데리고 갔단다.
우리 집 남편은 둘째를 데리고 어린이 집으로 갔다가 바로 출근할 거고, 나는 재택근무를 할거지만 운전을 잘 못하므로 버스를 기다린다. 다행히 학교로 가는 버스가 금방 왔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부끄러움이 가슴속 한가득 부풀어 차오른다. 아침부터 애나 울리는 엄마. 소리 지르는 엄마. 부족한거 투성인 날 것 그대로 들켜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다. 버스에서 아이가 갑자기 목요일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 빌리고 반납하는데, 오늘 반납해야 할 책들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이랴. 매일 숙제가 담긴 폴더가 있는데, 그것도 빼놓고 왔단다.
또 살짝 언성이 높아지려 한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도시락 넣을 때 가방이 텅텅 비었었네. 나도 그제야 알아차린다. 왜 텅텅 빈 가방을 보고도 아무 생각을 못했을까.
가방은 전 날 미리 싸두는 거야.
버스 오르기 전 들었던 부끄러웠던 마음은 귀여운 정도였다. 워낙 학교 인원이 적고, 도서관 제도 같은 건 아마 한 반씩 일정 시간에 가서 반납하는 시스템일 텐데, 그때 책을 가져오지 않은 우리 아이가 마치 구멍처럼 크게 보일까 봐. 부모가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숙제도 학교에 가져오지 않는 아이처럼 보일까 봐. 얘네 부모는 뭐 하길래 아이한테 이렇게 신경도 못써주나 그렇게 생각할까봐.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고백하자면 평소에도 이런 건 자연스런 걱정이라고, 원래 학부모가 되면 이 정도 걱정은 하는거라고 위안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상상 속 걱정이 신경 한구석을 자꾸 긁는다.
선생님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왜 걱정할까. 아이가 선생님께 잘 보이기를 원했나? 아이가 좋은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숙제든 뭐든 다 놓치지 않는 아이로 인정받기를 원했나? 그 인정이 아이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거라 믿었겠지?
그런데 그 인정 때문에 아이가 항상 온몸에 긴장을 가득 안고 살아가야 하면? 놓칠까 봐, 잊어버릴까 봐, 안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항상 이만큼 채워두고 살아가면?
상상의 나래 속에서 부풀어만 가던 부끄러움과 걱정 같은 것들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잘근잘근 씹어본다.
결국은 아이의 몫이겠지. 아이가 제시간에 학교를 갈 수 있는 시간 관리, 책이든 숙제든 스스로 전 날 챙기는 책임감, 집에 오면 교복을 정돈하거나 빨래통에 넣는 자기 관리. 훗날 아이가 독립하여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배워가는 시기. 아이가 중요한 습관들을 본인이 주체가 되어 형성할 수 있도록 나는 옆에서 조력자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조력자 역할. 왜 이렇게 어렵니. 내가 비록 소리는 질렀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참고 지른 거라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다.
앞으로 노력해 볼 건, 괜히 체면 생각하느라, 아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느라 아이를 불필요한 감정의 늪에 빠지도록 하지 않는 것.
소리 지르는 건 줄이고 따끔히 말은 하도록 할게 그럼.
네가 요즘 말을 느므 은듣긴 흐즎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