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3학년이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수능을 보러 가는 선배들을 배웅하며 느낀 소감입니다. 그때만 해도 수능이 곧 입시의 결승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년이 바뀌는 3월이 아니라 11월, 수능이 끝나고 2학년 겨울방학부터, 저는 자신을 3학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수시 접수가 끝나는 9월이 바로 입시의 결승선이며 진학의 시기입니다. 새로운 반이 배정되는 3월은 이미 3학년 절반이 지나간 시점입니다.
왜 공부해야 해요?
이 질문은 제가 학생 시절, 어른들께 정말 많이 했었던, 그리고 지금은 상담하는 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아마 어릴 적 어른들 당황시킨 분만큼 저에게 다시 되돌아오나 봅니다.
이 질문을 받는 것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제대로’ 답하기가 꽤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된 답이 아닌 걸 알면서도 ‘되는 대로’ 답하는 어른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되는 대로’에 해당하는 답변들에는 대표적으로 ‘성공해서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등이 있습니다.
오랜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
여러분께 저의 생각을 고백함으로써 한 가지 비밀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제가 공부를 한 이유는 순전히 ‘있어 보여서’입니다.
현재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이 결코 미래의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습니다.
저는 공부가 마치 인생 성공 비결인 양 여러분을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제가 찾지 못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공부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인생은 수많은 결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드는 일련의 현상들이며, 어떤 한 사건 내지 의사결정이 인생 전반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공부로 삶의 대부분을 소진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다닌 ‘공부는 대체 왜 할까?’라는 내면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여도 그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중 내가 하게 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더 어려운 질문이 내면에 피어나는 시점이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답을 모른 채, 삶의 대부분을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왜 공부를 열심히 했나요?
처음부터 저의 시선이 공부를 향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른들이 “그 노력으로 공부하면 서울대 가겠다.”라고 꾸중을 듣는 ‘딴짓’에 몰입하던 학생입니다. 저는 만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공부하다 말고 자꾸 한 눈을 파는 그 분야에 대해 탐구해보라고 추천을 하고는 합니다. 그곳이 바로 내 적성이 숨어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수다 떨고 글 읽고 쓰기. 제가 일이나 공부를하다 말고 자꾸만 손과 눈이 향하는 ‘딴짓’입니다. 야자시간에 읽은 가벼운 만화와 소설, 그리고 영어 듣기 하는 척 선생님들 눈을 피하며 몰래 들은 사연 읽어주는 라디오를 생기부 독서활동 뒤에 한 칸을 늘려 기록했으면 생기부가 지금의 2배는 되었을 것입니다.
대학 입시, 성공적인 인생. 모두 관심 없던 제가 처음 가진 꿈은 무려 ‘변호사’였습니다.
일기 검사를 면제받기 위해서 타당한 이유를 찾다가 관련 법 조항을 발견하고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며, 개인의 사상의 자유는 자칫 검열로 느껴지기 쉬운 권위자에게 제출하는 과정을 통해 제한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이후, 제 설명을 듣고 납득하신 담임선생님께서 저의 요청을 들어주신 날, 저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고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내가 쓴 글 한 줄이 영향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는 단순히 나의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구나, 논리적인 이론과 근거로 뒷받침해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단순히 우기는 것, 떼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일기 제출 면제받기> 프로젝트는사생활이라는 권리에 대한 개념, 이를 보호하는 법령을 외우는 것만으로 타당성과 추진력을 얻었습니다.
저에게 공부는 내가 하는 딴짓이 ‘무언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수단이었고, 지금은 정말로 자유롭고 즐겁게 ‘가치 있는 딴짓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수업을 듣고 복습하고, 만족스러운 대입 성과를 얻지 못했더라면, 저의 글과 말은 그저 낙서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도 읽어주려, 들어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아모르 파티 (Amor Fati)
개념을 외우고, 문제를 풀고, 성적을 잘 받아, 명문대에 합격하는 일에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라면 충분합니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노력과 소망이 곧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뿐이며, 그 시작은 잔소리 듣기 싫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다. 와 같은 사소한 계획에서 출발합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 운명애(運命愛)는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 능동적으로 더욱 사랑스럽게 개척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