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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음 Dec 27. 2022

일 보 후퇴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9시, 요가 수업을 위해 맞추어 놓은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가지 말까. 게으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30분쯤을 침대에 누워 고민하다 문득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일상에 실패란 단어를 기록하지 않겠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요가원으로 향했다.


비좁은 요가원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 여행의 피로를 요가로 풀며 상쾌한 아침을 맞이해보자. 싱잉볼 소리가 울리며 수업이 시작됐다.


비장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첫 동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발바닥을 세운 채로 무릎을 꿇는 동작. 발바닥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급하게 주변을 살폈지만 나 빼곤 모두가 평온해 보였다. 또 나만 문제인가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지만, 여행에서 2만 보를 걸은 탓이라 자기 합리화를 했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초반에 했던 동작을 반복하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까보다 이완된 내 몸을 느껴보세요.”


신기하게도 아까 내 발바닥을 괴롭게 했던 동작이 훨씬 수월했다. 발바닥을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굳어있던 근육들이 자연스레 이완되어 있었다. 선생님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무심코 흘려보냈을 변화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궁금증이 생겼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무심코 놓쳐버린 내 안의 변화들은 얼마나 될까?


올여름, 향상심으로 가득했던 상반기의 나를 비웃듯이 번 아웃이 찾아왔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 좋아하던 것들을 좋아할 에너지가 없어졌다. 번아웃은 성공한 멋진 사람들에게나 오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번 아웃이라니. 인정할 수 없고 창피했다.


좌절과 실패로 뭉뚱그렸던 시간을 다시 꺼내 펼쳐 보았다. 다시 무언가 좋아할 힘을 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꾸준히 운동했고, 상담 치료도 받았다. 내 마음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멀리하고 긍정적인 자극들만 취사선택했다.


분명 이건 실패의 뒷걸음이 아니라 두 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다. 다시 달리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을 힘이 생겼다. 주변엔 따뜻한 사람이 좀 더 많아졌다. 시야를 가려 늘 나를 긴장하게 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작년보다 조금 더 선명해지고, 이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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