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근영 Dec 24. 2021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프라하 광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이야기 


이번 유럽 여행에서 본 크리스마스트리들은 하나같이 다 예뻤다. 각 도시의 개성을 드러내는 장식으로 꾸며져 보는 재미까지 더했다. 그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것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프라하 구시가 광장의 트리라고 말하겠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냥 반해 버렸다.


여행은 계획과 우연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직조하는 섬유와 같다. 비엔나 호텔이 록다운 해제 이후에도 오픈이 미뤄지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방향을 틀었던 프라하. 너무 오랜만의 방문이라 낯설고 어색했는데 구시가 광장에 우뚝 세워진 트리를 보는 순간 화롯불 앞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따스해졌다. 이글이글 타올랐다 금세 식어버리는 불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나흘 머무는 동안 낮에도 밤에도 몇 번씩 지나다녔던 구시가 광장. 시간과 상관없이,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트리는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답은 구글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올해의 트리는 21.5 미터 높이의 독일가문비나무(Norway Spruce,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라고도 함)이며 체코 북부의 Dolní Černá Studnice라는 마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프라하시는 매년 크리스마스트리를 선정하는 대회를 여는데 나무를 선택하는 기준이 재밌다. 


‘독일가문비나무여야 하고 높이는 20미터 이상, 시각적으로 건강하고 가지가 규칙적으로 나 있으며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포장도로에서 중장비가 들어가 나무를 벌채하고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나무의 건강상태가 좋아야 한다.’


체코 전역의 응모자들은 봄 무렵, 나무와 지역의 사진과 함께 장소에 대한 설명을 보내면 대회가 시작되고 11월 1일 결과가 발표된다고 한다. 11월 20일경 나무를 벌목하여 광장에 설치하고 올해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11월 27일에 트리 점등식을 하였다(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크리스마켓은 결국 취소되었지만 크리스마스트리는 그대로 남았다).



올해 선정된 나무의 주인은 그동안 이 나무를 너무 사랑했으나 최근 들어 집 주변의 길까지 뿌리가 뻗어나가 지장을 받게 되자 베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프라하 광장에 세울 트리를 찾는다는 뉴스를 보고 응모하게 되었는데 당첨되어 너무 기뻐했다고. 당첨자는 CZK 10,000 (1만 코루나 = 약 54만 원)의 상금도 받는다고 하니 나무 주인에게는 금상첨화였을 듯하다. 


베어져 생명을 다한 후에도 한 달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스한 빛을 선물하는 나무.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찬란한 모습으로 생이 이어졌다. 내 생명이 끝난 이후 난 누구에겐가 한줄기 빛으로라도 남을 수 있으련가. 


#Merry_Christmas_to_you_all


매거진의 이전글 스트라스부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만난 어린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