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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Dec 08. 2023

온전히 볼 수 있는 마음으로

보기seeing를 생각해보기

 1. “내가 봤어! 진짜로 봤다니깐!”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목에 핏대를 세운다. 무엇을 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하다. 눈에선 진실을 목격한 자의 눈빛이 흘러나온다. 아이들이 동요한다. “그래, 애가 봤다잖아. 그럼, 진짜겠지 뭐...” 말끝을 흐린다. 이건 능동적인 긍정이 아니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봤다’는 행위를 믿어 보겠다는 수동의 긍정이다. 이들은 하나의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보는 것이 사실 그 자체’라는 믿음, ‘보이는 것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말이다.


2.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시대가 있었다.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냉철한 이성으로 감정과 선입견 같은 불순물을 걸러내면 투명하게 볼 수 있다고 믿는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만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마음은 부정당했다. 누군가는 꾸며낸 이야기라 했고, 어떤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성의 심판대를 거친 눈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어설펐다. 이 시대에 넘쳐나는 질문이었으나 어쩌면 제대로 묻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나는 온전히 볼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3.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바뀐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그 세계 속에서 ‘본다’. 이를테면 똑같은 사진을 다르게 보는 것처럼 말이다. 사막을 달리는 트럭에 수많은 짐이 무분별하게 적재되어 있고,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빼곡하게 사람들이 앉아있다. 어떤 이는 전쟁 또는 내전으로 인한 피난민의 행렬을 떠올릴 것이다. 무질서하게 적재 된 짐은 전시의 다급한 상황을 드러낸다. 고작 하나의 트럭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위태롭게 올라탔어야 하는 이유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사막과 흑인이라는 이미지는 ‘아프리카계 흑인’을 연상시키고 이는 내전이 끊이질 않는 그네들의 상황과도 딱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이 사진은 전쟁의 참상과 비참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윤리적 결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4. 그러나 다른 이는 이들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주목한다. 위태롭게 보이지만 사진 속 이들은 즐거워 보인다. ‘뭔가 우리는 알 수 없는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나?’ 상상해 보기도 한다. 단체 여행이라 하기엔 인원이 과도하게 초과한 것 같다. 트럭을 혹사하면서 이동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러운 것 같아 웃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하여튼 분명한 건 그들은 즐겁다는 사실이다. 또 어떤 이는 이들의 생리 작용을 걱정하기도 한다.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급하게 용변을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서 답답해하거나 호흡이 어려운 사람이 생기지 않을런지.


5. 나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로 등교하던 추억을 꺼내 봤다. 5일장이 열리면 버스 안에서 서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어느 할매의 보자기에 싸인 수탉은 연신 울어대고 빠져나올 틈을 노리며 긴장감을 조성했다. 다른 할매들이 가져온 배추, 무, 이름 모를 나물들로 바닥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내가 중심을 잡는 게 아니고 할매와 할배의 빽빽한 틈 속에서 우린 서로 품을 의지하며 시내를 향한 30여 분간의 여정을 버텨야 했다. 할매의 배추와 무가 굴러가 문이 닫히지 않을 땐 눈치껏 내려가 배추도사, 무도사 구출 작전을 벌여야 했다.

 

6. 똑같은 사진을 본다. 그리고 다른 것을 본다. 여기서 누군가 ‘내가 진짜로 봤다니까!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데 그 모습이 참 비극적이었어. 그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고 있다고!’라고 우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이 본 것, 사진 속 이들의 즐거운 얼굴과 생리작용에 대한 걱정 어린 마음은 모두 잘못 본 것, 거짓이 되고 마는 걸까?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사진’을 보고도 시골 버스의 추억에 잠긴 나는 사진 속 피난민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냉혈한이 된 걸까?


7. 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보는 사람이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는 이유는 - 사실 이게 진짜 이유이다 -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굳건히 믿는 어린아이 같은 철없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사진을 본다. 나는 사진을 오롯이, 온전히 볼 수 없다. 도대체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보는 마음은 언제나 사실의 한 조각, 찰나의 진실을 겨우 좇아가고 있는 수준이다. 이런 내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섣부르지 않게 당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나에겐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는가. 나는 당신의 마음을 오롯이 봐 줄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인가. 이것이 가만히 들여다본 나의 보는 마음이다.

 

8. 보는 마음에 대한 회의와 냉소는 어쩌면 온전히 바라보는 마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오롯이 그대의 마음을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시인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대를 또렷하게 응시하기 위해서다. 나는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대를 볼 수 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는 것 너머에 보지 못한 더 넓은 세계가 있다. 다짐한다. 그대를 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겠노라고. 신뢰한다. 아직도 보지 못한 더 큰 존재로 그대는 우뚝 서 있을 거라고. 언제나 나의 시야보다 당신은 더 크고, 넓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로 가득한 존재이다.


9.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시대에서 탈출한다. 좁디좁은 이성의 눈만으로는 투명하게 볼 수 없다고 믿는 시대에 정착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마음은 긍정한다. 누군가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어떤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코웃음 치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성의 심판대를 거친 눈을 향하여 진정 ‘온전히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인가’라고 다시 신문하겠다. 보는 것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이어 나간다. 이전 시대에 넘쳐나는 질문이었으나 어쩌면 제대로 묻지 못한 질문을 다시, 나에게 묻는다.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나는 온전히 볼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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