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 공지영, 분도출판사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장 38절)
예수가 대답을 한건지, 안 한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진리를 위해 그의 목숨을 투신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진리에 뿌리를 내리는 종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모두 ‘참 진리’를 갈구하는 구도자적 삶을 산다. 진리를 향한 갈망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로 이 세상에 현현한 실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그네들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예수를 떠나기도 했다. ‘세속의 부’가 진리인 부자 청년은 예수를 진리로 인정하지 못했기에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영생의 말씀’ 곧 진리가 있음을 발견한 베드로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를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다.(요6:67-68) 그렇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진리에 자기를 투신하는 삶이요.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여기, 진리를 갈구하는 한 구도자의 이야기가 있다.
진리가 왔다
저자는 199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진리와의 극적인 만남 곧,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저자는 격앙된 언어로 그리고 급박한 문체로 써나간다. 진리가, 구원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낭만적이고, 품격있는 모습’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의 옷을 입고 다가왔으며, “강도와 같이, 납치범 같이, 고문자와도 같이” 왔다는 것이다.
진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씨름하던 그녀가 엎어져 토악질 하던 그 순간에 벼락 같이 찾아왔다. 결국 진리의 ‘집요한 추격과 추궁’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후로 저자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구원이 왔다”는 ‘사실’에 있다. 진리가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다. 본인이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은 날에, 진리가 벼락같이, 천둥같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마주하기 싫은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릴 때, 삶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그제서야 비로서 진리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자에게 진리는 고통으로 찾아왔다.
내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다른 당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믿는 하느님의 모습이 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은 매우 엄격하다. 꽉 짜여진 규칙과 규율을 지키도록 몰아붙이는 하느님이다. 때론 엄격한 규칙과 규율로 인해 인간이기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조차 삶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엄격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피곤한줄 모른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하느님을 믿으니까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에게 다가온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었고, ‘기다리는 하느님’이었으며, ‘꽤 많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이었다. 서로 믿고 싶은대로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이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인간은 결국 유한한 이성과 경험으로 ‘하느님 알아가기’를 시작한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분만 지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하느님의 부분은 우리의 욕망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일 가능성이 높다다. 저자는 “내가 이제껏 알던 하느님이 그 하느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 저자는 ‘무언가 그녀의 가슴을 쳤다’고 한다. 그렇다. 진리는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치며’ 온다.
진리는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치며 온다.
변한 것은 단 하나
저자는 고백한다. 진리가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치며,”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진건 없다. 그녀의 환경은 여전히 절망이었고, 삶의 짐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럼 변한 것은 무엇인가? 진리를 만난 그녀가 ‘진리로 얻게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라고 저자는 담담하게 고백한다. 너무 싱겁나? 아니다. 저자는 진리를 만나기 전에 조차 ‘하느님은 늘 그녀와 함께했고, 그녀의 삶을 간섭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 곧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그 순간부터 “삶은 영원히 바뀌어 버렸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상황이 변한 것 없이 비루하고, 절망의 연속일지라도 그녀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있으니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모든 상황은 하느님이 허락하실만 했으니 허락한 상황”, “감사가 없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다는 진리”를 깨닫기에 이른다. 그래서 과거에 본인이 실수를 저질렀다면 스스로를 자책하고 심하게 몰아붙였을 자신이, 이제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그래도 제 주제에 이 정도면 잘했죠?’라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고백한다. 상황과 환경이 달라진 것은 없다. 여기에 대처하는 본인의 마음, 곧 ‘삶의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계속되는 신비한 종교적 체험과 더불어 저자의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근본적으로 ‘삶의 자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저자는 약간은 들뜬(기쁜 나머지), 그러나 절제된 언어들로 담담하게 고백한다.
가장 중요한건 사랑이죠
종교 집회 중 신비한 종교 체험들은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이적과 기적은 그리스도교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타 종교 또는 무속신앙에도 많이 등장한다. 신들린 무당은 날이 시퍼런 작두위에 올라가 춤을 추고, 어른 덩치 만한 돼지가 무당 창 끝에 올라가기도 한다. 세상은 넓고 종교는 많으며, 입이 떡 벌어지는 기적과 이적은 넘쳐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종교 집회 중 등장하는 ‘이적과 기적’ 곧, 종교적 체험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타 종교와 심지어 무속신앙에서도 종교 체험과 기적은 쉽사리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하는 본질과 독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그리고 ‘하느님’이 본인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저자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다고 고백한다. 이미 여러 아이의 어머니인 그녀이지만, 놀랍게도 ‘사랑’을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하느님은 “마리아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며 찾아온다. 그녀가 ‘진리’앞에 와르르 무너진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사랑이라는 토대’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신이 나를 사랑해서 찾아온 종교를 본 적이 있는가?’ 묻는다. 결국 저자의 삶이 변한 것은 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운 진리인 것을 보여주면서...
가톨릭이 매력적인 이유
분석 심리학자 칼 융은 어릴적 종교로부터 받은 상처로 종교를 매우 혐오하지만,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한다. 심지어 종교를 적극 권장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에 따르면, 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한 상처는 무의식에 자리 잡는다. 융은 이 무의식과의 접촉이 정신 건강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개성화 과정에 있어서도 필수적인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자신의 “뿌리와 만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자신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의 핵심이며 의미 그 자체인 무의식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한 만남이 없다면 사람들은 무의미성밖에는 경험하지 못한다. 무의식과의 이런 관련성을 지속시켜 주며, 그것에 계속적인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 융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며, 삶의 원천이며, 삶의 의미 자체인 것이다. 박노권,「융의 종교 이해 평가」
칼 융이 주장한 종교의 긍정적 기능을 전적으로 옳다고 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자기의 “뿌리와 만나는 것”이라는 종교의 기능은 주목할만 하다. 저자가 찾아가는 수도원에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과, 자기의 뿌리와 씨름했던 선배들의 삶이 가득하다. 그들의 물건은 성물이 되어, 더 이상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마음을 울리는 ‘상징의 도구’들이 된다. 가톨릭에는 칼 융이 말한 종교의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수도원과 성물들이 가득하다. 성물과 성채는 신자들의 뿌리를 찾는데 긍정적 기능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톨릭의 이러한 부분들이 부러웠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 소외 현상이 극심해지는 현재, 왜 가톨릭의 신자는 갈 수록 더 증가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가 말했다. “인간의 삶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실존은 선택해야 한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저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가 일평생 치열하게 고민한 ‘인간 존재의 근본 문제’에 대해 그려낼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문학, 철학, 예술 모두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목적’을 규명하려 애쓴다. 저자는 인간의 존재 이유 곧, “왜 사는가?”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를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한다. 곧 ‘하느님을 알아 경배하고, 자기 영혼을 구제하려고’ 태어났다.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절규한다. 왜 선한 신은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는지 분노하기도 한다. 저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가 욥의 고난을 상기하며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은, ‘삶의 방향성’을 찾았다는 것 이다. 삶은 넘어지고 엎어짐의 반복이다. 그러나 방향만 잃지 않으면 된다. 내가 “왜 사는가?”를 명확히 알았다면, 이제 넘어지고 엎어지고의 문제는 ‘삶의 근본을 뒤흔들 만큼’ 거대하지 않다. 더이상 악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는다. 악을 초월하는 존재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자의 고백이요 결론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에게
진리는 단순하지 않다. 호락호락 하지도 않다. 역설적이게도, 진리는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 진리는 우리의 낭만적인 기대와 바램을 산산히 조각낸다. 그리고 고통을 허락한다. 그러나 고통을 견뎌낼 힘을, 고통을 넘어설 인내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평화. 참 평화가 임한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예수는 대답하였다. ‘온 몸으로’ 말이다. 진리는 고통이며, 진리는 목숨을 던지는 것이라는 대답을 예수는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여. 예수의 대답을 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온 몸으로’ 그가 대답한 진리를 만나 보는 것은 어떤가? 저자는 그 진리의 향연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