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품은 자연 안에서 더 영화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여름밤, 그리고 영화. 사실 영화는 어느 계절에 갖다 붙여도 잘 어울리지만 유독 여름이라는 시간이 배경으로 깔리면 그 자체로 꿈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체온과 비슷한 계절, 농도가 짙어지는 색채. 20대 내내 지독하게 쫓아다니던 불안과 걱정이 처음으로 걷힌 때에 맞이하는 이 여름이 아름다워서 자주 멍해졌다.
친구들과 처음 강변에 수영을 하러 간 날,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가 근처에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야외에는 접어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더 안쪽의 나무 데크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흐린 구름처럼 숲 사이에 걸려 있었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돔 형태의 게이트 위 나무 간판에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이라는 글자가 공중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가 2019년에 독립출판으로 만들었던 책 '사적인 파라다이스'의 영어명을 표기할 때처럼 PARADISE가 붉은 글씨의 대문자로 박혀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한참 간판을 바라보았다. 외벽에는 최근에 마르코와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포스터도 걸려 있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너무 멋질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상영일이 아그랏 암 아가타 페스티벌 날짜와 겹쳤다. 가능한 날짜 중 <One for the Road>라는 영화가 있었다. 정보를 살펴보다가 마르코가 좋아하는 독일 배우 프레데릭 로(Frederick Lau)의 이름을 보고 반가워했다.
7월 21일 일요일 오후, 사라와 베언트 커플을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붉은색과 하얀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깔린 야외식 테이블이 줄지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음식이 접시 위에서 그림을 그렸다. 주말 오후답게 모든 테이블에 사람들이 꽉 차 있던 탓에 고요하고 민첩한 자리 전쟁을 벌여야 했다. 어떤 이들은 테이블에 앉기를 포기하고 길가에 설치해 둔 낮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혼잡한 주말에 홀로 나와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 풍경이야. '사적인 파라다이스'가 장소적인 실체를 가진다면 바로 이 모습일 거라 생각하자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그때 접시를 거의 비워가는 커플이 4인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커플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와 베언트가 도착했다. 5가지 음식에 15유로, 3가지 음식에 10유로였다. 둘둘씩 자리를 지켜가며 음식을 담아왔다. 매력적인 수많은 음식들 중에서 신중하게 고른 뒤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르코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런데 나는 어쩐 일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어, 채린. 그게. 그 친구가 저기 있어.
이모네 가족이 키우는 고양이 이름, 그리고 내가 참 좋아하는 언니의 예명. 신기하게도 줄줄 겹치는 이름이라 마르코와 함께 이모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일부러 고양이를 자꾸 부르며 장난을 쳤었다. 겹겹이 쌓인 농담 위로 드디어 그녀의 존재가 드러났다. 마르코의 친구들은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알아온 커다란 그룹이라, 그 친구는 사라와 베언트와도 당연히 오랜 친구 관계였다. 마르코가 나를 만났듯 이 친구도 현재 잘 만나고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만난 친구와 헤어질 때쯤 마르코도 이 친구와 이미 끝난 인연이었기 때문에 사실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마르코가 내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고 있었다.
⎯ 그런 것 같았어. 난 진짜 괜찮아. 인사하자!
음식이 든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몸을 우리쪽으로 돌렸다. 마르코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도 포옹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 순간이 뭔가 싫지가 않았다. 마르코가 멋쩍게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상황을 마주한 적이 없어서 마르코의 마음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당황했을까나. 그녀와 일행은 길가 근처로 가서 앉았다. 나와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가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건네주었다. 베언트의 사촌 여동생이 우연히 친구와 놀러 왔다가 우리 테이블과 합석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겼다. 사라가 영화 상영 때 사용할 블루투스 헤드폰 4개를 받아왔다. 다같이 헤드폰을 끼고 보는 영화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영화관의 불을 끄듯 천천히 해가 가라앉았고 야외 스크린 데크에서 관객 입장을 알렸다. 오스트리아 국민 음료 알름둘러(Almdudler)를 한 병씩 손에 들고 자리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다시 그 친구와 마주친 우리는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다 같이 헤드폰을 착용하고 기술 담당자가 연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헤드폰 LED 불빛을 밝혔다. 바람이 불듯 모두의 헤드폰에서 초록빛이 켜졌다. 광고가 한 차례 지나갈 때 볼륨을 조절했다. 스크린이 어두워졌다가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직 독일어를 완벽하게 알아들을 단계도 아니었지만, 상황과 장면을 조합하며 이야기를 쫓아갔다. 독일식 유머가 나오면 중간중간 마르코가 설명을 해줬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스크린에 가득히 펼쳐졌다. 가끔씩 헤드폰 한쪽을 밀어서 열린 귀로 주변에 펼쳐지는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었다. 빼곡한 나무들 사이에 새들이 숨어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다.
영화는 딱 적절한 엔딩으로 끝이 났다. 스크린에 크레딧이 올라올 때쯤에는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 불이 환히 밝혀지는 실내 영화관과는 달리, 영화가 끝난 순간이 은은하게 페이드 아웃되어 여전히 아름다운 바깥 풍경으로 이어졌다. 나무의 실루엣이 어둠과 합쳐져 경계가 모호해졌다. 낯선 나라에 담겨 있는 이 상황을 그려본다. 장거리 연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머나먼 이동을 이끈 사랑의 감정은 무엇일까. 세상 모든 예술의 절반 가까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일들은 언제나 이야기로 에둘러 표현된다. 언젠가는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영화처럼, 소설처럼 그려볼 수 있을까? 연인의 과거와 나의 현재, 우리의 미래가 파도처럼, 그러나 평화롭게 뒤섞인다. 현재는 깊은 현실 속에서 흘러가는 영화 그 자체다.
지난여름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상영한 목록
7월 12일 Juliette im Frühling (2024 / 코미디, 드라마 / 프랑스)
7월 15일 Gondola (2023 / 로맨스, 코미디 / 독일)
7월 16일 Barbie (2023 / 코미디, 판타지 / 미국)
7월 17일 Ein Glücksfall (2023 / 스릴러, 코미디 / 프랑스)
7월 18일 Zunbreakable (2000 / 스릴러, SF / 미국)
7월 19일 Es Sind die Kleinen Dinge (2023 / 코미디 / 프랑스)
7월 21일 One for the Road (2023 / 코미디, 드라마 / 독일)
7월 22일 Das Zimmer der Wunder (2023 / 코미디, 드라마 / 프랑스)
7월 23일 Eine Million Minuten (2024 / 가족, 코미디 / 독일)
7월 25일 Anselm - Das Rauschen der Zeit (2023 / 다큐멘터리 / 독일)
7월 26일 Checker Tobi und die Reise zu den Fliegenden Flüssen (2023 / 다큐멘터리, 어드벤처 / 독일)
7월 27일 Perfect Days (2023 / 드라마, 내러티브 / 일본)
7월 28일 Fearless Flyers (2023 / 코미디 / 아이슬란드, 영국, 독일)
7월 29일 Geliebte Köchin (2023 / 로맨스, 드라마 / 프랑스, 벨기에)
7월 30일 Wochenendrebellen (2023 / 코미디, 스포츠 / 독일)
8월 1일 Wermeer - Reise ins Licht (2023 / 다큐멘터리 / 네덜란드)
8월 2일 Kleine Schmutzige Briefe (2023 / 코미디, 미스터리 / 영국, 미국, 프랑스)
8월 5일 Monsieur Blake zu Diensten (2023 / 코미디, 로맨스 / 룩셈부르크, 프랑스)
8월 6일 Andrea Lässt Sich Scheiden (2024 / 코미디, 드라마 / 오스트리아)
8월 8일 Die Giacomettis (2023 / 다큐멘터리 / 스위스)
8월 9일 Die Einfachen Dinge (2023 / 코미디, 드라마 / 프랑스)
8월 11일 Back to Black (2024 / 음악, 다큐멘터리 / 영국, 프랑스, 미국)
8월 12일 Der Junge und der Reiher (2023 / 판타지, 어드벤처 / 일본)
8월 13일 OH LA LA - Wer Ahnt denn Sowas? (2024 / 코미디 / 프랑스, 벨기에)
8월 14일 Gescholossene Sponsorenveranstaltung
8월 15일 Joan Baez - I am a Noise (2023 / 다큐멘터리, 음악 / 미국)
8월 16일 Morgen ist Auch Noch Ein Tag (2023 / 코미디, 드라마 / 이탈리아)
8월 18일 Ein Ganzes Leben (2023 / 드라마, 히스토리 / 독일)
8월 19일 Was Will der Lama mit dem Gewehr? (2023 / 드라마 / 부탄, 대만, 프랑스, 미국, 홍콩)
8월 22일 Rickerl (2023 / 코미디, 드라마 / 오스트리아, 독일)
8월 23일 Liebesbriefe aus Nizza (2024 / 코미디 / 프랑스)
8월 24일 Past Lives (2023 / 로맨스, 드라마 / 미국, 한국)
8월 25일 Immer Wieder Dienstags (2022 / 로맨스, 코미디 / 스웨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