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아닌 강과 호수에서 보낸 여름
수영장에서 푸른빛과 투명한 물에 둘러싸여 수영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음악이 연주될 때가 있다. 어딘가에 피아노가 잠겨 있어 툭툭거리는 나무 타건 소리가 들리고, 느리고 반듯한 멜로디가 함께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대에는 속도를 낮추고 우주를 떠돌듯 느리게 수영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물에 잠겨 있는 몸에서 화와 슬픔으로 생성된 물질이 스르르 빠져나온다. 그 순간 귀는 물 안에서 공기 중과 다른 소리를 수집한다. 그 소리 너머로 알 수 없는 피아노 멜로디가 들리고. 하지만 언제나 그 소리는 상상으로만 재생되었고, 물 밖에 나와 샤워를 하고 나면 멜로디는 사라졌다.
수영장 아니면 바다에만 뛰어들어봤던 나는 처음으로 도나우 강에 몸을 담갔다. 내가 살면서 마주한 강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물에서 수영을 한다는 게 어색했다. 바다에서 호흡을 잘못하면 입 안 가득 짠 물을 머금는데, 강물은 특별한 맛이 없어서 그냥 내 몸의 일부 같았다. 무지막지하게 밀려오는 파도도 없었다. 내 힘을 넘어서는 올곧고 굵직한 센 물살이 있을 뿐. 수영을 하다 보면 스탠드업 패들보드(SUP)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는 튜브를 타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커다란 반려동물을 안고 함께 떠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 홍수가 크게 났었는데, 덕분에 강변에 모래가 잔뜩 쌓여서 진짜 해변처럼 변했어.
⎯ 와, 축복이다. 그래도 재해가 선물을 남기고 갔네.
강변에서도 해변과 똑같이 푹신한 모래가 깔려 있고, 여기서는 커다란 나무 그늘도 덤으로 누릴 수 있으니 오히려 여름을 나기에 딱 좋았다. 볕에서 몸을 말리고 있는데, 친구들이 술렁였다. 소피가 친구와 함께 SUP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우리가 있는 지점으로 잠시 들린 것이다.
⎯ 여름에는 보드를 타고 출퇴근하기도 해. 재밌고 시원하고 신나고!
친구 보드를 잠시 빌려서 한 바퀴 돌았다. 물살을 따라갈 때는 속도가 빠르게 붙어서 얼른 주변부로 나왔다. 오랜만에 타는 보드가 재밌어서 한 바퀴로는 감질맛이 났다. 소피가 떠나고 아쉬운 마음에 한번 더 물에 들어갔다. 마침 햇볕이 부드럽게 퍼지는 시간대라, 물속에 앉아 잠시 명상을 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강물은 밍밍하고 자연스럽다. 이 낯선 감각에 매료되어 마르코와 함께 자주 물가를 찾았다.
독일은 여름 내내 축제 분위기다.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여기저기 촘촘하게 준비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일정이 맞지 않아 야외 공연들을 매번 놓쳤는데, 이번 여름 처음으로 캠핑과 음악 축제를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두 번의 음악 축제 중 아그랏 암 아가타(Agrat am Agatha)는 리덴부르크(Riedenburg)의 하이드호프(Haidhof) 지역에 있는 세인트 아가타 호수에서 7월 마지막 주말에 1박 2일 동안 열렸다. 축제와 함께할 주말을 위해 주중에 번역 작업을 최대한으로 끝마쳤다. 마르코가 첫째 날 저녁에 공연이 있어서 나도 촬영을 위해 아티스트 전용 팔찌를 함께 받았다. 무대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언제든 맥주가 무료로 제공되는 특급 혜택이었다.
미리 도착한 친구들이 잔디밭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호수로 뛰어들었다. 물 한가운데로 수영을 하다가 힘이 빠지면 거기서 몸을 뒤집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물에 반쯤 잠긴 몸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강의 초입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에 완전히 잠겨 있는 귓가로 음악 소리가 퍼져 들렸다. 물을 한 번 투과해서 듣는 라이브 음악은 물속의 소리와 섞여 생경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수면 아래에서는 바깥의 음악이 이렇게 들리는구나. 지금이 아니면 어떤 느낌인지 잊힐 것 같아 귀를 계속 잠긴 상태로 두었다.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우주를 떠도는 기분이 다시 찾아왔다. 몇 년 전, 슬픔과 허무함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시작한 수영이었는데 이제는 물속에서 환희와 평온을 어루만지고 있다. 내가 마음이 무겁든 가볍든 물은 힘을 빼서 가라앉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잔디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바깥의 벤치를 얕은 물가로 가져왔다. 친구들에게로 어슬렁어슬렁 헤엄쳐 가니 베니가 텀블러에 화이트 와인을 담아왔다며 한 모금을 권했다. 우리는 물에서 나와 공연을 좀 더 즐겼다. 하마터면 귀한 공연을 놓칠 뻔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아방가르드 크라우트 록을 하는 남성 듀오 체멘트(Zement)를 알게 된 것이 이번 페스티벌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마르코를 통해 처음 크라우트 음악을 들었을 때 하나의 코드로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음악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혼란 속에서 분명하고 또렷한 빛을 따라 걸어가는 느낌. 체멘트의 멤버인 크리스티안 뷔델과 필립 하거가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선보이는 연주는 경이롭고 꿈처럼 느껴졌다. 오후의 빛과 무척 잘 어울렸다.
저녁에 마르코와 미로의 B2B 디제잉이 끝나고 메인 무대의 공연을 이어서 보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굵어졌고 멈췄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천막이 쳐져 있는 댄스 홀로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집에서 출발할 때 우산을 거의 챙겼다가 마지막에 짐을 줄이려고 뺏기 때문에 그런 멍청한 판단을 해버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언제나 해결책은 있는 법. 우리는 운영팀에서 나눠주는 쓰레기봉투에 구멍 세 개를 뚫어 머리와 두 팔을 집어넣고 다시 무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메라는 자주 꺼내지 못했지만, 그런 김에 공연 그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거침없는 여성 아티스트 프라우 프랏츠(Frau Fratz), 부시 이다(BUSH. IDA)의 무대가 이어졌고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에 밀라노에서 온 혼성 4인조 락 밴드 더 글러츠(THE GLUTS)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평소에는 잘 듣지 않는 음악도 페스티벌에서는 라이브로 경험해 볼 수 있다. 단전부터 끓어올려 소리를 지르는 음악을 평소에는 전혀 듣지 않는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이 록 음악에 왜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르코(기타리스트)와 클라우디아(베이시스트), 다리오(드럼)가 기계처럼 완벽한 연주를 들려주는 동안 프런트맨 니꼴로는 악마에 사로잡혀 무대를 지옥불처럼 만들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광기였다. 록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도 이 정도로 매료되는데, 마니아들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저 호수 안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을까! 이글거리는 공연이 모두 끝난 후 흥을 가라앉히지 못한 이들의 밤이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안타깝게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고 가랑비가 계속 내렸다. 음울한 광경을 뚫고 블라스카펠레(관악 합주단)가 경쾌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공연이 끝날까 봐 얼른 비옷을 대신할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무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장실을 들렸다 조금 늦게 걸어갔는데, 마침 내가 무대 앞을 지날 때 합주단이 연주를 시작해서 마치 나를 위한 행진곡처럼 들렸다. 마르코가 쓰레기봉투를 쓰고 박자에 맞춰 걸어오는 나를 보고 신나게 웃어댔다. 청년 두 명이 아침부터 호수 안에서 물장구를 치며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바이스부어스트와 프레츨로 바이에른식 아침을 즐겼다. 즐거운 기운 덕분인지 오래간만에 먹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곳을 가득 채웠던 열기와 즐거움이 호수 아래로 스며들어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여름을 지내는 동안 많은 순간을 물에서 보냈다. 회사 생활을 모두 끝내고 처음으로 만끽하는 온전한 해방감이 여름 햇살과 함께 빛났다. 부드럽고 자극적이지 않지만, 망설임 없이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 나의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요히, 침묵을 지키며, 에너지를 가득 머금기를. 나의 기록도 그렇게 유유히 흐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