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플로막트(Flohmarkt)에서 기회와 마주치기
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꼭 필요하거나 더는 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야 하는 것들 말고는 새 물건을 구입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마음을 쏟고 시간을 함께한 오래된 것들에는 질리는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이십사 년 전에 처음으로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가서 사 온 강아지 인형도 어제 나에게 온 것처럼 늘 애틋하다. 혹시나 닳아져 버릴까 하루하루 아쉬워하며 아껴 만지는 나를 보며 오래된 것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형태뿐만 아니라, 습관과 사랑하는 감정이 들어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습관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서툰 한국어 문장을 서걱서걱 써내려 가던 1995년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는 습관은 일기 쓰기와 책 읽기 뿐이다. 본능에 이끌리는 일기 쓰기와 의식적인 구조를 쌓아 올리는 글쓰기는 확연히 다른 마음가짐을 요한다. 집에서 입을 편한 옷을 고르는 것과 바깥에 나갈 옷차림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일기를 쉽게 쓰는 것처럼 글도 쉽게 써지면 좋겠지만, 이 행위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어렵다. 이러한 부담감에 대한 훈련이 아직은 덜 되었다. 집에 있는 옷을 툭툭 걸치기만 해도 근사한 패션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일기 쓰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내 삶으로 스며들어와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성질로 확장되었다. 거기서 비롯된 애정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대형 서점과 백화점보다는 조금 느슨한 분위기와 생활이 묻어 있는 도서관과 헌책방, 빈티지 가게를 좋아한다. 타인의 손길을 탄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에서는 뭔가 비슷한 냄새가 난다. 바싹 마른 햇살과 깊은 동굴이 섞인 냄새.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한 방울의 각기 낯선 냄새. 사람과 시간의 흔적이 덮이며 새로운 필요를 기다리는 냄새다.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코를 훌쩍이면서도 오래된 물건들을 살펴본다. 다른 시대에 생산된 물품에 대한 호기심이자, 마음이 가는 우연을 기대하는 설렘이다.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 나에게 독일에 있으면서 근사한 기회가 주어졌다. 주말마다 레겐스부르크 도시 전체가 플로막트(Flohmarkt, 벼룩시장)로 여기저기 들썩였던 것이다. 첫 플로막트는 발할라로 자전거 여행을 나섰다가 발견했다.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타이밍에 보물섬을 그냥 눈으로만 담고 지나쳐야 하다니! 필름 카메라와 오래된 그림, 책, 바이닐 음반, 그릇, 장식품들이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혹시나 정말로 운명의 물건을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발할라로 가는 길에 다 같이 먹을 수박 반쪽을 구매하는 것으로 잘 넘어갔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중에도 플로막트를 발견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살 떨리는 독일 외식 물가만 경험했더니 플로막트는 천국과도 같았다. 내가 관심이 없는 물건들은 한국이 싸다고 전 세계에서 우르르 쇼핑을 오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물품들은 언제나 한국에서 선뜻 파는 곳을 찾기도, 가격대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플로막트에 형성된 작은 소품과 책들은 대부분 거의 한 자릿수 안에 머물렀다. 내 삶에 더 가치 있는 물건들을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이야 말로 축복이 아닐까. 독일에서 살고 싶다고 결심한 마음에 플로막트가 무게를 더했다.
두 번째 플로막트는 올드 스톤 브리지 너머에 있는 슈타트암호프 지역에서 열렸다. 이곳은 구 시가지로, 중세 시대의 건축물과 거리를 훌륭히 유지하고 있어 올드 스톤 브리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역이다. 오래된 과거풍경이 현시대 사람의 생활과 함께 섞여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팔 물건들을 준비한 집들은 파스텔색 풍선을 달아 집 앞이나 창문틀에 묶어 표시해 두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풍선이 있는 집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집들은 집 안에 있는 정원으로 이어졌는데, 중장년의 주인들은 넉넉한 웃음으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나 손님이 오든 말든 자기 시간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의 첫 보물찾기 물품은 독일어로 쓰인 헤르만 헤세의 책. 헤르만 헤세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신기하게도 시의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쉴 새 없이 문장에 줄을 긋고 삶을 돌파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작가다. 서울에 있을 때는 신촌의 공씨책방을 한 시간 정도 뒤적거리다 앞표지와 책등이 다 닳은 헤르만 헤세의 <Politische Betrachtungen(1970, Suhrkamp, 국내에 출판된 제목은 <정치적 고찰>)을 첫 원서로 소장할 수 있었다. 이제는 독일에 왔으니, 작가의 모국어 문장으로 공부하고 새롭게 음미할 너무나 좋은 기회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도 헤르만 헤세의 책이 놓여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내 어느 집 주차장 안에서 진열된 스무 권의 책 중 헤세가 1920년에 발표한 <Wanderung>(2015, Insel Vertrag, 국내에 출판된 제목은 <방랑>)을 찾아냈다. 그의 시와 수필, 직접 그린 삽화가 수록된 책이다.
새 책으로 15유로에 판매되고 있는 책을 1유로에 구매했으니 14유로를 번 셈이다. 거기다 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에디션을 더욱 선호하니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구매 옵션이 아닌가! 아직 독일어를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하는 단계이지만, 신이 난 마음으로 책을 연신 펼쳐보았다. 플로막트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도 한국으로 가져가면 1년 뒤 독일로 이사 올 때 그대로 또 들고 와야 하기 때문에 무게가 가볍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헤르만 헤세의 책을 발견했으니 다른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루에 물건 하나의 기쁨이면 충분하니까.
풍선이 달린 집을 더 찾다가 커다란 차고를 발견했다. 차고 입구에는 아기와 함께 1층에 내려온 젊은 부부가 있었다. 플로막트 참여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다가 우리가 내년 봄이나 여름쯤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게 됐다. "어? 마침 저희도 내년에 그즈음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날짜 잡기가 애매해서 집을 안 내놓고 있었거든요. 혹시 집 한 번 둘러보시겠어요?" 그렇게 상품을 둘러보던 우리는 아이 엄마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널찍한 거실을 지나치자 넓은 부엌 공간이 나왔고, 이를 지나자 중간 크기의 거실이 하나 더 나왔고, 마지막 공간에는 거의 거실만한 방이 하나 나왔다. 방이 독특하게 넓게 나와서 이 부부는 일하는 책상과 아기 침대까지 가져다 두고 쓰고 있다고 한다. 이것저것 물어본 뒤 연락처를 주고받고 온 나와 마르코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레겐스부르크 안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동네이고, 이들이 말한 월세는 공간과 위치에 비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진짜 좋은데? 우연히 플로막트 왔다가 행운을 만났네!" 아마 내년에 와서 다른 후보지를 마저 물색해 볼 예정이지만, 미리 한 곳을 봐 두어서 그래도 든든한 기분이다.
플로막트가 끝나는 오후 4시가 다 되어갔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3명이 함께 모여사는 주택이었다. 이곳은 신나는 음악이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건너편 집에 사는 젊은 예술가는 직접 그린 그림을 놓아두었고, 음악을 틀어 둔 곳에서 아페롤 슈프리츠 칵테일을 팔고 있었다. 수작업에 관심이 많은 한 친구는 열심히 둘러보다가 전기와 관련된 키트 하나를 구매했다. 마르코와 나도 아페롤 슈프리츠로 축배를 들었다. 헤르만 헤세 책을 찾았고, 뜻밖으로 살 집까지 찾았으니 이번 플로막트는 매우 성공적이었던 걸로.
한번 들리는 여행지가 아니라, 내가 곧 살게 될 동네라고 생각하니 동선이나 분위기 등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보게 된다. 주변에 방문해 볼 수려한 도시가 너무나도 많아 한국인들에게는 이곳이 여행지나 주거지로 그다지 인기가 없는 곳이지만, 그래서 난 더 신이 난다. 조명을 제대로 받지 곳이니 내가 기록할 것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니까! 내년에 이사 오는 여름에는 플로막트에서 어떤 운명의 오브제를 만나게 될까. 중세 도시에서 살아갈 시간이 기대된다. 오래된 것들 위로 새로운 이야기가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