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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Nov 10. 2024

글 :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는 일

생각과 글의 완결성,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

아무리 애써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신영복 교수의 옥중 글쓰기가 떠오른다. 신영복 교수는 1968년 건국 이래 최대의 공안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간 복역하였다. 서슬이 퍼런 시대에 감옥에서는 글쓰기가 제한적이었다. 신영복 교수와 같은 사상범에게는 더더욱 글이란 무기를 쥐어 주기 싫었을 것이다. 감옥에서는 한 달에 한번 외부에 나가는 엽서를 쓸 수 있었고 그것도 간수가 지켜보는 중에 순서를 기다려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달에 한번 감옥 밖에 있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글이지만 분량도 시간도 극히 제한적이다. 작은 엽서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야 하고 뒷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빠른 시간 안에 적어야 한다. 이렇게 보낸 엽서의 내용을 엮은 책이 1993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2003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영인본이 나왔다. 그가 당시에 감옥에서 썼던 엽서 등을 그대로 스캔하여 엮은 책이다. 신영복 교수의 생전에 한 강연에서 이 영인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종종 그에게 묻는다. 짧은 시간에 현장에서 바로 적은 글인데 어떻게 틀려서 지우고 다시 쓴 흔적도 없느냐고, 내용 이 오래 고민하고 쓴 글처럼 앞뒤가 잘 맞고 문장이 여러 번 퇴고한 글처럼 매끄러우냐고.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한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써서 전하면 그 편지를 받는 가족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걱정하겠는가. 안부를 전하고 있었던 일을 말할 때에도 내용을 잘 선별하여 정돈된 말투로 적어야 하는 데 이런 글을 교도관이 보고 있는 중에 짧은 시간 동안에 쓰기는 힘들다. 그러니 한 달 내내 편지의 내용을 생각하고 다듬어 머릿속으로 토시 하나까지 통째로 외워서 편지 쓰는 장소에 들어간다. 머리에 이미 완성된 글이 있고 엽서 위에 그 글이 그대로 쓰인다. 그야말로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굴리어 매끄러워질 때까지 다듬어 써 내려간 글이라는 말이다.


글이란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는 일이다. 한강 작가도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소설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굴리는 것'이 자신의 즐거움이라 말 한 바 있다. 나는 생각을 굴린다는 표현을 들으면 산 꼭대기에서 떨어진 바위덩어리가 비탈을 구르며 다른 돌들과 부딪혀 모서리가 깎기고 둥글게 변해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거친 모서리들이 떨어져 나간 바위는 산 아래 흐르는 물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 바위는 다시 긴 세월 흐르는 물에 깎기고 씯겨 더욱 둥글게 변한다. 세월의 힘으로 그 표면이 옥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다. 이렇게 거친 바위가 둥글고 매끈한 수석으로 바뀌 듯, 깊이 생각하여 정돈된 생각을 잘 전달되는 매끈한 문체로 써 내려가고 싶은 것이 모든 쓰는 이들의 바람이리라.


이처럼 생각을 다듬고 이를 매끄러운 문체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다. 쉽게 얻지 못하는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좋은 글이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좋은 글은 문장의 완결성과 흡입력 있는 문체를 넘어서 모두에게 와닿고 가슴을 울리는 무엇이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전달하는 작가와 작가의 정신이 글 속에 담겨 있다. 문장이 무공이라면 작가의 정신은 화려한 무공 속에 담긴 기공이다. 신영복 교수와 한강 작가 또한 멋진 문장과 논리적 완결성 위에 작가만의 색깔과 정신, 작가만의 그 '무엇'이 있기에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옛사람들의 산문에서 듯 깊은 문장을 골라 엮은 정민 교수의 책 <석복> 중 문유삼등(문장의 세 가지 등급)이란 글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글을 읽고 그 사람이 보여야 좋은 글이다. (중략) 글 너머로 작동하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이 있어야, 어떤 글을 써도 그 사람의 빛 깔이 나온다. 수사가 뛰어나고 주장이 제아무리 훌륭해도 이 한 가지 물 건이 없이는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어찌해야 이 물건을 얻을 수 있나? 우리가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다
- 정민, <석복> 중에서 p92.

무림의 고수들이 뛰어난 무공을 갖추고도 기공을 완성하지 못하여 일생을 속을 끓는다. 주화입마(走火入魔)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사경을 헤매는 이들도 부지기 수이다. 글 쓰는 이들은 기공을 갖추고 자신의 글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자신의 글이 분신으로 남아 자신의 유한함을 넘어 영속하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으로 글 속에 담을 자신만의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 평생을 끊임없이 공부한다. 기공을 갖추어 입신의 경지에 오르기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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