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인해하지 마 사람은 불인해하면 약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드라마 <안나 Anna>의 대사 중에서
드라마 <안나>의 대사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불안은 인간의 본능이다. 맹수들을 피하여 어두운 동굴 속에서 숨어 살던 인간은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지만 그 불안이 없었다면 인간종은 이 별에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테다. 작은 기척에도 벌떡 일어나 도망갈 자세를 취하게 했던 불안의 본능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다. 나아가 우리의 불안의 대상은 원시 시대의 인간들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우리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못 이루고 시시각각 새로운 불안이 출현하여 매 순간을 가슴 졸이며 살아간다.
나는 비행기를 타게 되면 그 전날 저녁부터 불안감에 휩싸인다. 몇 년 전부터 생긴 불안감이다. 혹시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으로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떤다. 매우 여유롭게 공항으로 출발하고 미리 게이트 앞에서 서성인다.
나는 한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야 하는 직장에 다녔다. 해외 영업을 하며 해외 곳곳의 전시를 참여하기 위하여 일 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고 한 달에도 여러 번 비행기를 탔다. 수년간 이렇게 지내니 비행기를 타는 횟수가 버스를 타는 횟수보다 많고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일이 굉장히 익숙해졌다. 그런데 왜 나에게 비행기를 못 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생겼을까.
어느 날 저녁 나는 동경에서 전시를 마치고 후쿠오카로 들아가기 위해 공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나는 공항 가는 시간을 빠듯하게 잡았고 탑승 수속이 간단한 국내선이라 더욱 방심했다. 버스는 늦게 왔고 그날 밤 나는 다음 날 아침 출발하는 첫 비행기 표를 사서 공항의 캡슐 호텔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매우 이른 시간에 탑승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여전히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 안 이 가게 저 가게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정신줄을 놓고 한참을 공항에서 서성이다가 시계를 보니 이미 보딩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나는 서둘러 탑승구역으로 향했지만 내 표에 적힌 시간을 본 직원은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안내했다. 내 뒤에 몇 명도 뛰어서 입구로 다가왔다. 늦게 도착한 대여섯 명을 한꺼번에 들여보내주려나 생각하였지만, 잠시 후 공항 직원은 우리에게 탑승수속 때 실었던 짐들을 비행기에서 내렸으니 발권 카운터에 가서 찾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시간관념과 규칙에 융통성이 없는 일본식 대응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발권 카운터에서 짐을 찾았고 다시 핸드폰으로 다음 비행기표를 끊었다. 같은 공항에서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른, 1시간 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그런데 잘 보니 비행기가 출발하는 터미널은 내가 있는 곳과 다른 터미널이고 터미널 간을 이동하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발권 카운터를 찾는 데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나는 다시 세 번째 비행기를 놓쳤다.
나는 가만히 서서 생각해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진정하자. 차분하게. 나는 그날 저녁 매우 늦게 후쿠오카 옆 키타큐슈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밤 버스를 타고 자정이 넘어서야 후쿠오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이 속담이 이 상황과 딱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경서 세 번의 비행기를 놓친 다음부터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불안에 시달린다. 비행기를 탈 생각을 하면 그날 공항에서 세 번 비행기를 놓치던 상황과 당황하였던 기분이 떠오르고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할까 봐 불안하다. 불안에는 불안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불면을 가져오고 불안으로 다른 일들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나의 불안을 돌이켜 보자. 불안은 불편하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은 합리적인가? 나의 불면은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요한가? 비행기 출발 전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는 것은 필요한가? 조마조마한 마음은 비행기를 제시간에 탈 수 있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가?
많은 인간이 불행해지기 전에 미리 불행을 상상하며 이미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다. 닥치지 않은 불행에 대한 우리의 걱정은 눈앞의 행복을 가린다. 이 과도한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나의 불안에 대하여 생각하며 나는 스스로의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이런 방법들을 생각해 본다.
1. 운에 맡기자.
예일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걱정 중 85%는 절대로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일이고 발생할 15%의 일 중 79%는 사람들이 자신이 걱정한 것보다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우리 걱정의 97%는 일어나지 않거나 관리할 수 있는 일들이다. 걱정 중 무의미한 97%를 줄이고 나머지 3%는 운에 맡기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2. 상상할 수밖에 없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상상하자.
비행기를 놓치는 상상보다는 제시간에 비행기를 타서 편안하게 비행기 위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자. 불안이 상상의 결과라면 긍정적인 상상을 하자.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운다. 어느 늑대가 이길까? 답은 당신이 먹이를 주는 늑대이다. 상상도 이와 같다. 어떤 결론을 상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상상은 더욱 힘이 생기고 상상의 힘으로 상상 속 결론은 현실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불안의 약이다.
3.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그 일로 무엇을 잃는지 따져보자.
지금 내가 가진 불안이 과연 이렇게 마음을 졸여야 할 일인지 알아보려면 걱정하는 일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비행기를 놓치면?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된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놓칠까 봐 불안하여 지금 눈앞의 많은 행복들을 못 본 체 지나친다면 차라리 한번 더 비행기표를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각오하고 눈앞의 시간들을 즐기는 것이 낫다.
4. 현실적으로 대비하자.
가장 근원적인 불안의 해소는 불안의 대상이 되는 일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다. 비행기를 놓칠까 봐 하는 걱정의 근원적인 해법은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된다, 이지만 그러지는 못하니 비행기를 제 시각에 탈 수 있게 미리 장치를 해 두면 된다. 미리 계획을 짜서 움직이고 늦잠을 자지 않게 알람을 켜 놓는다. 이것도 못 믿겠으면 친구에게 모닝콜을 부탁하고 혹시 비행기를 놓치면 거액을 주겠다고 약속하라. 사람은 실수로 돈을 잃는 것보다 내기에서 돈을 잃는 것을 더 싫어한다.
5.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누가 뭐라 해도 여전히 불안한가? 그렇다. 인간의 불안이란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으려 하여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종의 DNA에 깊이 새겨진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자. 불안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현상임을 받아들이면 불안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인간은 배가 고프다는 것 자체로 불행하지 않다. 먹고 싶은 데 못 먹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불안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배고프지 않으려 애쓰는 것과 같다.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 불안을 거부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그만큼은 더 편안해진다.
생각해 보면 불안은 배짱의 문제이다. 그러면 어떠냐,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인생의 자신감이 있다면 불안이 줄고 불안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배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말이 있다. 근거 없이 무작정 스스로를 믿고 볼 일이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니,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