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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Dec 01. 2024

내가 바라는 서점 #이터널저니

#아난티 앳 부산 코브

서울역, 7시 50분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7시 즈음 사무실을 가려 사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입다 표를 사고고 집을 나서니 바로 횡단보도가 열리고, 횡단보도를 건너니 바로 버스가 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기차 출발까지 10분이 남았다. 그 10분을 쪼개어 롯데리아에 들러 델리버거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마음을 먹자 순풍에 배가 떠밀려 가 듯 부산으로 가게 된 셈이다. 실행을 쉽게 하는 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서 뭘 할 줄 몰라 못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해 보라 말해주고 싶다. 배운다고 배운 대로 되는 것은 없다. 하면서 배운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고 용감한 놈이 뭘 해도 한다. 당신은?이라고 묻지 마라. 나는 사업을 알 것 같아 시작했지만 역시 미리 알아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다 혼자 배우는 거다.


기차가 부산에 도착하자 며칠 전에 내린 폭설로 철로 수리 구간을 지나느라 도착 시간이 24분 늦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철도법에 의거하여 철도 도착이 20분 이상 지연되면 지연된 시간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상을 해 준다고 한다. 아 이런 것도 있구나 오늘도 몰랐던 것을 하나 알았다. 새로운 것을 하나 안 김에 오늘은 이전과는 좀 다른 루트로 부산을 돌아볼까 생각했다.


지난달에는 부산 기장군에 있는 용궁사에 들렀다. 오늘은 그 옆에 있는 고급 리조트인 아난티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정식 명칭은 <아난티 앳 부산 코브>이다. 몇 해전 가족들과 함께 이곳을 둘러보고 근처 대게집에 들른 적이 있다. 큰 건물을 통째로 쓰는 이 가게는 대게를 고르면 쪄서 내어주는 가게이다. 손이 큰 동생이 너무 많이 시켜 한가득 남기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기억은 감정이라더니 아난티 부산은 그날 남기고 온 대게와 랍스터의 아까운 기억에 묻혀 있었는 데 오늘 아침 문득 묻혀 있던 아난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높은 천장과 바다를 바라보는 탁 트인 창, 입체적으로 연결된 잘 지어진 건축물, 고급스러운 가구와 조명,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기억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항상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부산역에 내렸다. 서울을 이미 겨울이 깊어져 손이 시릴 정도인데 부산은 여전히 가을 날씨이다. 맑은 날씨이다. 구름은 파란 화선지에 흰 먹으로 그린 그림 같다. 부산에 도착하면 부산역 앞에 유라시아 광장에 나와 인증 사진을 찍는다. Busan is good이라는 모던한 조형물이 서 있고 그 앞에서 부산을 들른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흩어진다. 나도 이 조형물을 뒤로하고 셀피를 찍으며 부산 여행을 시작한다.

사족 1.

'부산은 좋다(good)'. 이 애매한 표현은 아마도 우리말 부산이 좋다(I like Busan)의 잘못된 번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좋게 생각하자면 국내외로 두루두루 쓰임 있게 만든 캐치프레이즈라고도 할 수 있지만. LG의 브랜드를 외국에 알리기 위하여 두 합병회사의 이름(Lucky Gold Star) 대신 Life is Good (인생이 좋다, 사실은 생명이 선하다?)이라고 한참 선전했다. 그런데 이게 이 말이 LG라는 전자 회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아해했던 사람들이 많다. 따라 했다면 오답 지를 컨닝하였네.

(-!! 잠시 직업적인 시니컬함이 튀어나왔습니다. 널리 양해 바랍니다.)


전철을 타고 해운대에서 내려 아난티까지 택시를 탔다. 지난달 들렀던 용궁사를 지나고 아까운 대게의 기억이 남은 <대게만찬> 건물이 지나 아난티 정문에서 내렸다. 1층에서 한 층을 내려가면 내가 좋아하는 서점과 상점들이 모여있는 그라운드 층이다. 1층에서 그라운드 층까지는 대리석으로 만든 넓은 원형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데 층고를 매우 높게 설계하여 마치 라푼젤의 원형탑을 걸어 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워형 계단을 넓게 만들면 반지름이 긴 원처럼 계단 전체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진다. 즉 비효율적인 공간이 생겨나는 것인데 나는 이런 비효율, 혹은 효율을 생각하지 않고 미적인 관점에서 만든 무효율의 공간을 좋아한다. 일반 건물의 두 배에서 두 배 반에 이르는 높은 층고, 이유와 쓰임을 알 수 없는 드넓은 복도. 건축가가 자기 돈으로 지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이런 공간의 무효율적 사용이 내가 이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서점 <아난티 코브 이터널저니>는 대형서점이라기에는 너무 작고 독립 서점이나 개인 서점이라 부르기에는 꽤 큰 규모의 서점이다. 바다를 마주하는 호텔의 길고 넓은 라운지를 서점으로 꾸몄다. 이 공간에서 눈에 띄는 두 가지는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 테마별로 책을 모아둔 것과 고급 소파와 테이블을 이용하여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넓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척 보아도 이 서점에는 매우 뛰어난 북코디네이터가 상주한다. 그가 이끄는 뛰어난 기획 팀이 있을 것이다. 이 코디네이터는 분명 어느 대형 서점에서 일하던 꽤나 이름난 코디네이터였을 것이고 아난티는 고급스러우나 대형 서점에 비하여 방문객이 현저히 적은 자신의 서점으로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꽤나 큰 연봉을 제시하여야 했을 것이다.


아난티 부산이 바다와 마주한 라운지 공간 전체를 서점으로 전용한 것은 그 자체로 큰 결정이다.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리조트 안에서의 서점의 매출로 식당이나 기타 매장의 매출을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서점으로 만든다면 아난티적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공간을 기획하는 사람을 고를 때 적당히 눈에 띄는 신예로는 불안했을 테고 분명 업계에서 이미 널리 실력이 인증된 최고급 인재를 모셔왔을 것이다.


책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서점에서 책을 코디네이팅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북 코디네이터란 그만큼 지적인 수준이 높은 직군이다. 이런 자존심 센 집단에서 사람을 움직였으니 그만큼 돈을 많이 들었을 것이지만 아난티는 그로 인하여 천혜의 자연과 멋진 건축물에 더하여 아난티적인, 고급스러운 문화적 자산을 갖추게 되었고 이 공간이 아난티의 문화적 수준을 두 세 단계 상승시켰으니 넓은 공간을 서점으로 전용하고 최고의 코디네이터를 유입한 아난티의 결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이 서점은 테마별로 책들을 모아두었다. 명사의 책 코너가 있아 응원의 말과 사인을 비치하고 그들이 쓴 책과 추천한 책들을 모아두었다. 여느 서점과 같이 노벨상 수상작을 모아두고 한강 작가의 책들도  빠짐없이 비치해 두었다. 모든 책을 갖추기보다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역할에 충실한 서점이다.


서가와 매대 한켠에는 고급 소파와 테이블 세트로 된 독서 공간이 넓게 자리한다. 서점을 찾은 사람 여럿이 듬성듬성 앉아 있지만 여전히 더 많은 자리가 남아 있을 정도로 넓은 자리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다양한 책들을 빠짐없이 비치하여야 하는 탓에 효율적 공간 활용이 우선인 대형 서점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교보문고에 책을 읽는 공간이 생겼지만 자리의 개수도 방문객 수에 비하여 턱 없이 적고, 이를 도서관 학습실로 생각하고 아침부터 자리를 맡아 하루 종일 공부하는 노공족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조용히 앉아 책을 넘겨 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나는 일본의 츠타야, 미국의 반즈 앤 노블(Barnes & Noble),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하버드 쿱(Harvard Coop) 같은 서점 공간을 좋아한다. 이 대형 서점들의 시초는 반즈 앤 노블일 것이다. (1873년 Charles M. Barnes가 일리노이 주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에 가면 어느 도시를 가든 이 서점에 들러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 이 서점들은 교보문고와 닮았지만 기본적으로 주요 지역 곳곳에 많은 지점이 자리하여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스타벅스 등과 협업하거나 별도의 독서 공간을 충분히 만들어 여유로운 독서 체험을 만들어 준다. 이는 바글거리는 인파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교보문고가 가지지 못하는 점이다.  


일본의 츠타야(TSUTAYA) 서점은 한국에서 몇몇 도서관과 지점의 뛰어난 건축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츠타야는 단순한 건축물이나 도서관 콜라보를 넘어 대형 서점의 모델을 한층 더 발전시켰고 지금도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모회사 CCC(Culture Convenience Club)는 그 이름답게 서점이란 프레임에 여러가지 문화를 접목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의 제품들을 홍보하거나 뛰어난 장인 기업들의 제품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주기적으로 강연, 교류회, 전시 등을 연다. 문화와 제품, 아이디어와 예술을 잇고 공간을 통하여 융복합시키려는 시도이다. 나 또한 일본 이주 초기에 츠타야의 서점에 마련된 스타트업 카페(Start-up Cafe, Fukuoka)라는 공간에서 많은 젊은 기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공간이 가진 힘이다. 온갖 잡놈들과 잡것들이 섞이는 광장에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아난티 서점, 이터널저니는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공간에 들어선 고급스러운 문화 공간이다. 나는 이 공간이 한국의 서점 문화를 한층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실험적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넓이와 그 안에 부은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서점의 매상이야 눈물이 나올 만큼 적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니 비즈니스적으로도 분명 큰 자산이다. 인구가 도시에만 몰려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접근성 좋은 입지에 이런 공간을 여럿 만든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겠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이처럼 더 널찍한 공간에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서점을 곳곳에 가지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서점 <이터널저니>에서 머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 그다음 행선지였던 해운대를 취소하고 곧장 서면역으로 향했다. 내가 숨겨놓은, 하지만 모두가 아는 맛집인 <포항 돼지 국밥>에서 수육백반을 먹고 근처 서면시장에서 찹쌀 도넛을 샀다. 도넛 가게 대각선 앞이 떡볶이 맛집 <신촌깻잎떡볶이>이다.


오늘은 부산에 들러 내가 만들어 보고 싶은 공간을 하나를 담고 돌아왔다. 해외에는 이미 여러 모델들이 있고 이제 한국인의 문화적 수준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빵빵하니 이 땅에서 못할 것도 없다. 수준 있고 멋진 공간, 고급스러운 광장, 문화의 교류가 넘치는 살롱을 만들어 보자.     

사족 2

내가 사는 종로에는 대형 서점이 많다. 종로서점, 영풍문고, 교보문고가 인근에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는 강남역 지하의 동화문고를 애용했지만 대학 때부터는 등굣길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여러 번 수업을 빼먹었다. 어차피 제칠 수업이었으니 책을 보다가 삼매에 빠져 수업을 못 들어갔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친구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시간 때우기에 가장 좋은 곳이 아무리 오래 있어도 누가 나가라고 하지 않는 대형 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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