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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Dec 01. 2024

옆 자리 승객 #부산행

KTX 031호 11번 차량에서

일요일 부산행 하행은, (이제 그만 상하를 없애자) 아니 부산행 열차는 내려가는 이가 (아니 가는 이가) 적다. KTX 11호차는 다른 자리가 텅텅 비었는 데 하필이면 내 창가 자리 옆 복도 자리에 한 아저씨가 앉아있다. 삭발이 유행인 요즘 트렌디하지 못하게 장발의 머리를 한 남성이다. 40대? 50대? 일요일 아침인데 검갈색 양복을 빼입었다. 이런 정장이라면 머리도 포마드(!, 내가 어릴 적 이런 것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헤어젤이라 해두자)로 잘 빗어 넘기는 것이 맞을 것 같은 데 아침에 머리를 감고 대충 말리고 나왔는지 머리는 부시시하게 갈라져 있다.


"저, 잠시 안에 좀..."

"아, 네."


하며 복도 자리에 앉은 그가 일어났다. 그다지 크지 않은 키지만 덩치가 있다. 몸에 꽉 낀 양복은 그가 가슴팍 쪽으로 힘을 주어 팔을 웅크리면 등짝이 쫘악 갈라질 것만 같다. 나는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여 창가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창쪽으로 몸을 붙이고 테이블을 펼쳐 사가지고 간 델리버거의 포장을 풀었다.


출발하기 전의 열차는 유난히 조용하다. KTX 031호 11번 안에 비닐 봉지에서 햄버거를 꺼내는 소리, 종이 봉지에서 감자튀김을 꺼내는 소리가 유독 요란하다. 나는 옆 아저씨의 빤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져 델리버서 세트를 최대한 빨리 해치우려 했는 데 한 입을 베어 물기 전에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좀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조근조근 친절한 사투리인데 어쩌면 그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아, 네 죄송합니다. 금방 먹을게요."


나는 조용히 버거의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막 한 입을 먹으려 입으로 가져가는 데,


"아니 여러 사람 타는 기차 안에서 이런 거 먹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생각을 좀 해보세요."


아까보다는 볼륨도 톤도 조금씩 올라가 있어 나는 이 제 이 일이 그냥 끝날 일이 아니구나를 직감했다.


"아저씨, 기차에서 도시락 안 드셔 보셨어요? 먹어도 되고요, 그리 냄새나는 음식도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나는 되는대로 논리를 세웠지만 사내는 나에게 햄버거를 끝내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뭐요? 냄새가 안나요? 참 내, 냄새나요 냄새나고요, 싫으니까 나가서 먹어주세요."


이 자식이 이제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난관이구나. 순간 욱하는 마음에 나도 놈을 콱 물었다.


"뭐라는 거야 이 사람아, 여기가 당신 집 안방이야 싫으면 당신이 나가 있으면 되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래라 저래라야? 왜, 감튀 하나 줘?"


끝장을 보겠다고 덤비던 사내는 나도 내친김에 세게 나가자 좀 당황한 듯 나를 옆 눈으로 빤히 노려보았다.


눈빛이 아주 사납구먼. 나는 일단 욱하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받아쳤는 데 생각해 보니 이 기차는 나의 고향을 떠나 이 사내의 '나와바리'로 가는 열차가 아닌가.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다가 이 무서운 사내는 나와 3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나의 퇴로를 막고 앉아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와서 죄송합니다 하면 주위에서 우리의 살발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이들이 큭큭하고 나를 비웃을 것이고 나는 오늘을 떠올릴 때마다, 아니 이제 경상도 사투리만 들어도, 롯데리아 간판만 보아도, 오늘의 치욕이 떠올라 얼굴이 붉으락거릴 것이다. 아, 이 놈의 성질이여. 나는 최후의 방법을 썼다.


"아저씨, 여기 시끄러우니까 저랑 잠깐 나가시지요? 나와요, 나와서 이야기하세요."


나는 일단의 쪽 팔림을 벗어나 두어 칸 앞의 차량 사이에서 그에게 적극적으로 사죄할 생각을 했다. 그게 사는 길이다.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고 다음역에 바로 내리자 내려서 조용히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자.


내가 벌떡 일어나려는 데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형님, 어디서 오셨어요? 제가 아침에 술이 덜 깨가, 죄송합니데이. 그람요, 여기가 지 집입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드십시오, 죄송합니데이."


방금 전 나에게 거의 소리를 지르듯 큰 소리로 말했던 사람에게 친절한 누군가가 빙의하였는 지 목소리도 아까와 다르다. 나는 다른 차원의 싸-함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뒤로 물러나면 안 된다. 호랑이를 만나면 잡아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열심히 내달려는 봐야 하는 것이다.


"아 그래요? 네, 그럼. 금방 먹고 치울게요."


나는 햄버거를 거의 한 입에 다 집어넣고 몇 번 못 씹고 삼켰다. 냄새가 좀 날 듯한 감자튀김은 다시 비닐에 넣어 꽁꽁 묶어 버렸다. 내 다시는 기차에서 뭘 먹나 봐라... 내가 다시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기차가 막 대전역에 도착한다. 내 옆 자리에는 푸근한 인상의 한 아주머니가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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