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근처에 살면 막걸리를 마실 일이 많다. 우선 막걸리와 어울리는 음식을 파는 가게가 많다. 지금은 철거되어 공터로 남아있는 이전 종로경찰서 옆에는 주차장이 있다. 이 주차장을 지나 걸으면 왼쪽으로 주차장 벽과 건물 사이로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이 보이는 데 이 비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막걸릿집들이 모여있는 골목이 나온다. 인사동의 안쪽 골목은 워낙 복잡하게 얽혀있어 다른 길을 통해 이 골목으로 들어오기란 쉽지 않다. 매일 저녁 이 협곡을 통해 애주가들이 막걸리를 마시러 이곳에 모여든다.
막걸리 골목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로 보이는 집은 <푸른별 주막>이다. 단층의 한옥에 들어선 <푸른별 주막>은 들어서는 순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벽에는 추억의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석유 드럼통 위에 둥근 철판을 올려 만든, 이른바 깡통 식탁에 등받이가 없는 플라스틱 보조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곳이다. 요즘 유행하는 레토르 감성의 가게가 아니고 이전부터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있다 보니 레토르가 된 가게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갓김치와 두부, 혹은 두부 김치 등을 먹는다. 독특하게 주전자 막걸리도 파는 데, 이 막걸리는 매우 빠르게 취한다. 그러니 두부랑 주전자 막걸리를 먹다 보면 정말 시간을 잊어버리고 어느새 정신줄을 놓아버리기 쉽다. 이 가게에 재정신으로 에 들어간 사람도, 좀 마시고 들어간 사람도 나올 때는 모두 만취로 나온다. 모두 딴 세상, <푸른별>로 가는 것이다.
<푸른별 주막>을 시작으로 막걸리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유목민 노마드> <누룩나무>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선 <달막달막> 모두 막걸리와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를 갖춘 곳들이다.
부녀가 운영하는 <유목민>은 막걸리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물.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대의 젊은이들과 함께하여 온 흔적과 그들이 남긴 강한 포스가 느껴진다. 어느 시절의 젊은이들은 이 가게에 삼삼오오 모여 밤새 막걸리를 마시며 토론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중년을 훌쩍 넘어선 당시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추억과 회상에 잠긴다. <유목민 노마드>라는 가게 이름이 잘 어울리는 가게이다.
<누룩나무>는 막걸리에 잘 어울리는 요리를 갖춘 집이다. 여러 종류를 막걸리를 마셔가며 여사장님의 깔끔한 요리와 최적의 페어링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요즘은 막걸리의 종류가 워낙 다양하여 이런저런 막걸리를 고르다가 결국 전에 먹어본 막걸리를 계속 마시게 된다. 기본으로 깔리는 반찬 안주들도 맛있다. 여사장님은 인심이 후하여 아낌없이 내어주신다. 안주로 주문한 요리를 다 먹고 반찬만으로 막걸리를 마셔도 쫓아내지는 않으시리라.
<달막달막>은 약간의 퓨전이 가미된 안주에 세련된 분위기이다. 젊은 사장이 운영하고 깔끔한 음식을 선호하는 여성 손님이 많다. 잔도 그릇도 신경을 많이 쓴 집. 막걸리와 안주가 고급화되는 시대의 추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집이란 생각이 든다. 이 집에서 오뎅 탕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 이 가게가 막 생겼을 때 한 두 번 가고는 자주 못 가게 되었는 데, 갈 때마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점심에는 사업하는 동네 형님과 점심을 먹으러 익선동을 지났다. 눈에 번쩍 뜨이는 오래된 간판이 눈에 들어왔는 데, 다름 아닌 장수 막걸리 대리점이다. 가게 앞에는 막 공장에서 들어왔는지 막걸리가 짝으로 쌓여 있었다.
막걸리는 무엇보다 신선함이 더 맛을 좌우한다. 요즘은 유리병에 담겨 비싸게 파는 막걸리들도 등장하고 잣이다 밤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막걸리가 차별화를 외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당일 나온 막걸리만큼 청량하고 맛있는 막걸리는 없다. 내가 사는 안국동 주변에 당일 나온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는 데, 우리나라 최고의 족발집으로 꼽히는 <장군족발> 집이다. 이 집에서는 그날 출고된 장수 막걸리를 마실 수 있다. 막 나온 막걸리는 병 밑에 가라앉은 부유물이 없다. 애써 흔들어 잘 섞지 않아도 끝까지 깔끔하게 비울 수 있고 맛도 훨씬 청량하다. 내가 그동안 마신 막 만들어진 신선한 막걸리는 아마도 이 집에서 받아 온 것이리라.
나는 괜한 호기심에 막걸리 대리점 사장님을 찾았다. 사장님, 혹시 낱병으로도 살 수 있나요? 인심 좋게 생긴 사장님은 정리하던 막걸리병을 내려놓고, 나에게 물었다. 왜요, 지금 드시게요? 나는 요즘 술을 마시지 않는 기간이다. 아니요, 나중에 사서 먹으려고요. 낱병으로도 파세요? 사장님은 판다 안 판다 대답 대신에 다시 물었다. 이 동네 사세요? 네, 이 근처에 사는 데요. 사장님은 짝에 담긴 막걸리를 두 병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네, 그럼 이거 가져가서 드세요. 나는 다시 손을 흔들며 아니요 사장님 지금은 아니고요, 그런데 얼마에 파세요? 네, 동네분들 오시면 그냥 도매가로 드려요. 그런데 도매가가 얼마인지는 알려주지 않고, 이거 그냥 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근처에서 안주 사서 드세요.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서 마시면 아주 좋지요 하며 막걸리 두 병을 봉지에 담아 친절하게 종이컵까지 두 개 넣어주셨다. 감사합니다! 이 동네에만 남아있는 인심이고 막걸리와 딱 어울리는 이웃의 정이다.
막걸리를 두 병이나 공짜로 받았으니 오늘도 참 좋은 날이다. 근처 편의점에서 새우깡이라도 하나 사들고 서순라길 끝 공원 벤치에 앉아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막걸리를 홀짝이고 싶었지만 낮술의 무서움을 아는 우리는 꾹 참았다.
간헐적으로 하는 100일의 금주가 열흘 남았다. 첫 술은 당연히 맥주가 되겠지만, 그다음은 막걸리를, 막 나온 신선한 막걸리를 마시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