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밖에 없었을지도
첫 번 째 이직을 결정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이직 후 일이 생각했던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을 때 마다 생각한다.
'그 때 맞는 결정을 했었나.'
이력서를 넣기 시작할 당시에는 반드시 회사를 옮기겠다거나 하는 절실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5년차 무렵이었나, 시작은 그냥 궁금해서였다. 나는 경쟁력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사무실에서 매일 있으면서 궁금했다. 나는 꽤 일을 잘 하는 사람이고 또 주변에서도 꽤 일을 잘 하는 편이라며 고과도 잘 받는데,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면 밖에서는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고싶었다. 사실은 당연히 원하는 자리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내가 하던 일은 해외마케팅이라 5년 전만 해도 그 당시 그 회사 말고는 특별히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국내 대기업에서 일했으니, 내가 일하던 업계가 경쟁업체가 많은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업무에 대한 전문성 뿐만 아니라 회사에 대한 충성도나 소위 말하는 '정신교육'도 중요한 국내 대기업들은 내부충원을 우선시하던 때라 경력직원을 자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이게 내가 내 몸값이 어떤가, 당연히 나는 괜찮은 사람일거야 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세상이 주는 답변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지고 싶지 않았다. 오기였을 것이다. 될 때까지 해봐야했다. 오기의 바탕에는 무서운 마음이 있었다. 여기가 아니면 나를 찾아줄 곳이 없다는 현실을 거부하고 싶었다. 회사를 위해 내가 좀 일을 해 준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갈 곳이 없어서 혹은 할 일이 없어서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될때까지 해 보자며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표현할 지 고민하고, 이력서를 고치고, 채용공고를 분석하고, 면접을 연습하고 또 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이력서는 내 이야기를 어렵게 암호지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해외마케팅이라는 것은 잘 설명하면 국내의 경험은 없지만 다양한 시장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상황을 겪어봤다는 장점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글로벌마케팅 경험을 통해 또래의 연차보다는 조금 더 문제 해결력이라거나 협업, 커뮤니케이션 (영어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채용공고에 맞추어 표현하니 조금씩 얼굴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니 이직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이직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의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5년 넘게 익숙한 이 곳이 결국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직을 했고, 그 이후에도 몇번 더 이직을 하게 되었다. 프로선수의 세계에서 이야기 하는 '저니맨'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직을 마음먹은 계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5년 넘게 일하던 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애착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다. 연차 대비 고과도 좋았고 인정도 받고 했다는 것은 나도 내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라고 지금도 자부한다. 우습게도 회사에서 주는 왠만한 상들을 받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지쳐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나는 '속도'에 대한 강박도 있었다. 동기들 대비 가장 빨리 승진을 해야 하고, 국내 기업들이 '특혜'처럼 주는 주재원도 실력대로 내가 제일 먼저 최 연소로 나가야한다는 목표도 있었다. 그 속도에 대한 강박이 나를 더 힘들게 하는지도 몰랐다. 대리가 솔직히 뭐 얼마나 회사에서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겠는가, 그래도 최선을 다 했다. 지금이야 우습지만, 그 때 나는 '회사와 결혼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딴 짓 안하고 열심히 회사를 위해서만 사는데 당연히 모든 것이 결과로 응당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곳은 아니었다.
그렇게 밀어붙이는 대리가 뭐 얼마나 일이 되게 하는 요령이 있었을까. 한국사회에서 '노련하게' 상황을 풀어가는 '예쁘게 말하기'는 그때는 참 왜 필요한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실적 위주의 험악한 회사 분위기도 한 몫 했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나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을 참 똑부러지게 한다'라는 이야기가 그 당시의 나를 가장 에둘러, 점잖게 표현한 주변의 평가였을 것이다. 그래도 남들보다 빨리 갈 것이라는 믿음과 목표가 있어서 좀 더 최선을 다했는데, 생각과는 다른 일들이 점점 일어났다. 일을 잘 한다는 것의 정의가 내가 내린 것과 남이 내린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승진이나 주재원의 자격 요건에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이유들로 밀려 나갔고, 억울한 마음만 가득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여자 동기들은 어느 새 가정을 꾸려 육아 휴직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선배들이야 그 때 내 눈에는 '나에게 다 시키면서 어른대접만 받으려는 이기주의지'였다. 후배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회사 밖에서 푼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24/7 회사 일 말고 다른 걸 생각한다는 것 조차 무언가 큰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 나에게 번아웃증후군을 선사하고 있는 때에 이직의 기회가 왔다. 바꾸면 나아질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이직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