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 이야기.
미국남부 조지아의 수도 아틀란타란 도시가 있다. 정서쪽으로 난 20번 하이웨이를 타면 버밍햄이 나오고, 남서쪽으로 난 85번 하이웨이를 타면 기아차 공장이 있는 라그란지를 지나, 현대차 공장이 있는 몽고메리가 나온다. 몽고메리는 알라바마의 주도이며, 1955년 로자파크스 여사로 시작된 버스보이콧 운동이 있던 곳이다. 민권운동 역사에서 뺄 수 없는 도시다.
이 몽고메리에서 다시 서쪽으로 80번 도로를 타고 한시간 정도 가면, 셀마라는 아주 작은 도시가 나온다.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십년후. 1965년 3월 7일 셀마에서부터 몽고메리까지 흑인들의 투표권을 보장받기 위한 행진이 있었다. 당시 많은 민권운동의 패턴이 그렇듯, 이 역시도 이미 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현실에서 얻어내기 위한 행진이었다. 이미 한해전 1964년 많은 운동의 결과로 인종에 따른 투표권을 제한하지 못하게 하는 민권법이 통과된 터였지만 남부주들에서는 법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흑인들의 투표권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방해하고 있었다.
2014년에 개봉한 <셀마>라는 영화에 이 내용이 잘나온다. 이 영화는 4명의 여자 아이들을 죽게 만든 버밍햄 16번가 교회 폭파로 시작한다. 셀마-몽고메리 행진 2년 전에 있었던 이 폭발테러는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라 당시 버밍햄으로 중심으로 있었던 남부의 수많은 폭발테러중 하나였다. 시민활동가들이 주로 모이던 교회에 kkk단이 폭발물을 설치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당시 버밍햄의 별명이 Bombingham이었다.
이런 적대적인환경 가운데 활동가들은 법으로 보장된 투표권을 얻어내기 위해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시작한다. 50마일 (약 80km)정도 거리를 걸어가 몽고메리 주청사 앞에서 연설하고 주지사에게 항의문을 전달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치는 계획이었다. 셀마를 떠나려는 첫번째 시도였던 3월 7일 시경계에 있는 에드문드 다리앞에서 경찰과 kkk단이 행진하는 사름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는 전국적 뉴스가 된다. 소위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사건이다. 세번째 시도만에 시위대는 셀마를 떠날 수 있게 된다.
물론 활동가들이 이 일의 시작부터 그 긴 행진을 하려던건 아니었다. The Black Belt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미국 알라바마의 남부지역중 흑인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흑인 투표권자는 전무했던 곳이있다. 그중 셀마는 The Black Belt중 하나인 달라스 카운티의 중심도시였다. 인구의 57%가 흑인이었는데, 그들 중 단 1%만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흑인들에게만 어처구니 없게 어려운 심사기준을 둔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투표권 투쟁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행진이 있기 두해전인 1963년 이미 SNCC (학생비폭력연합)의 두학생 리더가 내려와서 이곳의 DCVL (달라스카운티투표권자리그)와 함께 흑인 투표권 등록을 위해 지역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예로 1963년 10월에 이틀간 투표권자 등록기간이 있었다. 300명의 흑인들이 줄을 서있었지만, 그들에게 물을 가져다주던 봉사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하루종일 내리쬐던 태양 아래 서있던 이들 중 극 소수만 등록원서를 기록할수 있었고, 이들마저도 대부분 거부되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제 해가지나 1964년이 되면, 암살된 케네디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존슨은 프리덤 라이더로 대표되는 여러 활동들의 압박으로 민권법 Civil Rights Act에 사인을 하게 된다. 이법은 공공시설에서 흑/백 분리정책을 금지한다. 하지만 셀마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부지역에서는 여전히 분리정책이 시행되었고 이런 맥락에서 1965년을 맞게 된다. 지역 목사였던 프레드릭 리즈는 킹목사가 대표로 있던 남부목회자엽회 SCLC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킹목사의 SCLC는 12월부터 이 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며, 이미 1963년부터 활동해오던 SNCC와 협동하게 된다. 두기관은 활동방식에서부터 차이와 갈등이 있었지만 SNCC 대표이면서 SCLC의 보드멤버였던 존루이스 (현 민주당의원)가 중재역을 한다. 그가 대규모 집회에 관해 회의적이었던 SNCC를 설득해 함께 하도록 한다.
첫번째 행진 즉, 피의 일요일이 있기 3주 전. 활동가들이 셀마인근 카운티 법원 앞에서 시위를 했고,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지미리잭슨이라는 청년과 그의 어머니는 도망치다가 인근 카페에 숨었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려던 그에게 경찰이 발포를 한다. 그리고 이 청년은 8일 후에 숨을 거둔다. 운동가들은 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이제 셀마-몽고메리까지 행진을 결정한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잠시 곁다리를 타면, 폭력진압이 이뤄진 장소와 관련해 흥미로운 도시 내 권력구조가 있다. 셀마는 지금도 2만명 약간 넘는 아주 작은 도시다. (중심에 있는 AME교회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던 에드문드 다리 즉, 도시 경계까지는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작은 도시의 치안 담당자가 둘이나 있었다. 법원 블락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는 베이커가 담당했으며 그는 온건파였다. 법원 블락과 시외곽은 강경파 짐 클라크가 지휘했다. 그래서 셀마에서의 폭력진압은 모두 법원앞과 셀마 외곽인 에드문드 브리지에서 벌어진 것이다.
드디어 3월 7일 (Bloody Sunday): 600명 정도의 활동가들이 킹목사의 부재하에 몽고메리를 향한다. 가서 조지 월리스 알라바마 주지사를 만나 지미리잭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시 경계에 있는 에드문드 패터슨 브리지에서 시위대는 백인주립 경비대와 마주한다. 경비대는 몽둥이와 최루가스로 무장했고, 말탄군인들은 물론 지역의 21세이상 남성들도 모두 모였다. 잔인한 진압이 있었고 이 사건은 그날 저녁 전국적 신문기사가 되었다.
2차 행진이 있던 3월 9일 (Turnaround Tuesday): 잠시 자리를 비웠던 킹목사가 돌아오고 이틀뒤 킹목사 주도로 다시 한번 행진이 시도된다. 피의 일요일이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터라 전국에서 활동가들이 셀마로 모여들었다. 이제 시위대는 규모가 더 커져 2,500명 정도가 된다. 대규모 시위에 미온적이던 SNCC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활동가들 사이에는 행진을 할지 말지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 시위대에 호의적이었던 지역 판사는 행진허가를 내줄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고, 킹목사는 그의 지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현행법을 어기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이 많은 무리가 긴행진의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역활동가들과 몇명 강경파들은 지금 가야한다고 주장했고 킹목사는 긴 회의끝에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에드문드 브리지에 도착한 시위대는 폭력진압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미디어의 압박을 느낀탓인지 진압군은 그들에게 길을 열어준다. 이때 킹목사는 아직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행동을 하는데, 무리를 이끌고 맨앞에 서있던 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뒤돌아선다. 다시 셀마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날을 turnaround tuesday라고 부른다.
몽고메리로 가는 노상에 공격을 받을것이라 예상했는지, 혹은 준비가 덜되어 가는길이 너무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지 어쨌든 그는 돌아섰고 시위대도 모두 그를 따랐다. 사실, 이 행진 직전에 킹목사는 미법무장관 대리인과 린든존슨의 대리인을 만났다. 그래서 다리까지만 가고 거기서 안전을 보장받으면 행진을 그칠것을 제안받는다. 결국 다리앞에서 대치후 짧게 기도한 킹목사는 미리 제안받은 루트대로 돌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서 폭력사태를 피하게 되었고, 판사의 명령도 따르게 된다.
그날 밤: 시내 여러곳에서는 킹 목사의 행동을 두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회군계획은 SCLC중에서도 지도부만 알고 있었으니, 오로지 킹목사만 보고 따라온 2,500명의 시위대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불만은 많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킹의 행동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와 함께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런데 그날 밤 보스톤에서 온 한 백인목사 James Reeb가 백인무리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버밍햄 병원으로 이송후 죽었다. 시위대는 이제 뭐든 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판사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일주일가량을 기다렸고 17일에 결국 행진을 허락하는 명령이 나왔다.
3월 21일: 일요일 아침 8,0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몽고메리로 떠났다. 그렇게 5일을 걸어 목요일에 몽고메리에 도착했다. 주청사 앞에서 킹목사의 연설로 긴 행진을 마치고 모두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행진행렬을 자신의 차로 다시 셀마로 데려다 주는 자원봉사를 했던 한 여성은 노상에서 kkk단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등 마지막까지 평화롭지만은 않은 행진이었다. 그러나 이 행진을 통해서 주정부와 연방정부를 압박하게 되고 결국에는 투표권투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지금도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가는 80번 도로가에는 그들이 걸으며 캠프를 차렸던 곳의 표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몽고메리 주청사 앞 긴 대로에는 작은 여러 샵들과 꽤 맛있는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는 여러 시민권 운동 박물관들도 있으니 반나절 투어를 채우기 적당하다. 혹시나 미국 애틀란타에 방문했는데 하루나 이틀일정이 빈다면, 차를 빌려타고 셀마와 몽고메리투어를 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