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서빙의 삶"과 "서빙 받기위한 투쟁"이 포옹할때
영화 The Butler를 보고 나서 나름의 제목을 지어봤다. "The server and the served." 내겐 이 영화가 서빙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동등한 서빙을 받기위해 투쟁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보인다.
이 영화는 백악관에서 버틀러로 30년간 근무 하고 1986년 은퇴한 유진 앨런 Eugene Allen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 임기중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헐리우드 A급 배우들 총출동 했다. 백인들만의 하얀 공간이었던 백악관에서 내부자이자 외부자인 흑인 버틀러*의 시각으로 미국 현대사 (1960-80년대)를 조망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유사한 시기를 다룬 <<포레스트 검프>>가 있다. 다만, 이영화는 흑인의 시각으로 더 직접적으로 집중하여 인권문제를 다룬다.
*"집사"정도로 번역 가능한 버틀러는 큰 저택에서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뜻한다. 반드시 노예나 흑인이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영화는 1927년 남부 조지아주 메이컨 Macon의 한 목화밭에서 시작한다 (실제 유진은 버지니아 출신이다). 후에 버틀러가 되는 세실 게인스 Cecil Gaines의 어머니는 일하는 도중 백인 주인에 의해 강간당하고 이에 맞서던 아버지는 총에 맞아 사망한다. 주인집 할머니의 “호의”로 “하우스 니거 House Nigger: 집안일을 하는 검둥이”로 자라다가 도망친다.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호텔들에서 일하다 마침내 백악관에서 일하게 된다.
“백인의 눈으로 보고 그들이 원하는 걸 알아 내야 한다. 뭘 원하는지 알아내려면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들을 미소짓게 하라.” 그가 선배에게 배운, 그리고 평생을 충실히 살아낸 충고다.
백인의 눈으로 보며, 그들의 마음에 맞추며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첫째 아들 루이스가 테네시주 내쉬빌에 있는 피스크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그의 삶에 골칫거리가 생긴다. 루이스는 그곳에서 민권운동에 몸담게 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울워스 싯인 Woolworth’s sit-it*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학생비폭력운동*에 깊이 참여하게 된다.
아들이 참여한 싯-인 운동을 다루며, 영화는 직장 (백악관)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장면들과 교차 편집한다. 아들은 백인들만 앉을수 있는 식당 자리에 앉아 흑인들도 동등하게 앉을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이 서빙받을 권리 요청 (the right to be served)은 폭력과 경멸, 체포로 거부 당한다. 동시에 아버지는 케네디 대통령이 있는 하얀집에서 백인들을 서빙한다.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필요를 파악하며. 한명은 서빙 받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다른 한명은 서빙한다. 이 서빙이라는 메타포는 영화 후반부에 백악관 만찬신에서 다시 한번 역전되어 등장한다.
아들은 이어서 프리덤 라이드에 참여한다 (1961년). 싯-인 운동이 식당에서 함께 앉을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주간 inter-state 공공 교통수단에 함께 앉을 권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버밍햄으로 가는 중 KKK단의 습격을 받고, 이 에피소드는 그 유명한 “불타는 그레이 하운드” 사진으로 마무리된다.
미시시피 감옥으로 이송된 아들 루이스, 버밍험에서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장면, 이에 맞서는 킹목사의 시위 장면등이 빠르게 나열된다. 그중 케네디 대통령은 버틀러에게 이런 폭력적인 진압장면을 티비로 보면서 “지금까지 흑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몰랐지만, 이제 나는 바뀌었다”고 말한다. 세실이 “우리편”이라고 까지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텍사스 달라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다. 1964년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되고 그는 인권법을 통과시킨다.
이어지는 장면은 민권 운동의 두 상징이랄 수 있는 킹목사와 말콤 X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1965년 아들 루이스는 썸녀(?)와 함께 말콤 X의 연설을 듣고 나오는 길이다. 백인들의 방식으로, 그들이 정해준 대로만 살아가는 흑인들을 말콤 X가 비꼬며 House Nigger라고 칭하는데 여기에 아들이 발끈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아버지가 백인들의 버틀러로 있으니, 말콤의 표현대로 하면 그 아버지가 바로 House Nigger인 것이다.
반면 킹목사는 버틀러의 삶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한다. 테네시 멤피스 호텔방에서 루이스의 아버지가 백악관 버틀러로 있음을 알게 된 킹 목사는 비꼬지 않고 흑인 버틀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편견을 넘어서 근면과 성실로 백인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흑인에 대한 증오심을 없앨만큼 노동윤리와 인격이 훌륭했다. 굴종적이라 무시하지만 실은 그들도 (자신의 방식으로) 체제에 도전했던 것이고 그걸 본인들도 모를수 있”다고 말한다. 가상의 대화지만 이 평가는 흑/백 관계에 대한, 그리고 저항방식에 대한 두 인물의 상이한 접근법을 잘 보여준다.
버틀러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흑인들의 삶에 대해 말콤 X 식의 부정적인 평가는 거부하지만 이 영화는 무작정 "킹목사가 짱이야" 이런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이 버틀러로 (즉, 백인의 시선으로) 살아온 자신의 입장을 후회하듯 회고하는 장면을 보면 영화가 의도적으로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세실은 자신을 고용한 워너씨 (아마도 고용이나 급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가서 우리도 백인만큼 일하니 이를 급여에 반영해주고, 승진의 기회도 달라고 말하지만 거절당한다. 아마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첫 싸움일 것이다.
아들의 삶의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와 좀 더 멀어진다. 아들이 따르던 킹목사는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민권 운동지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들 루이스는 여자친구와 함께 집에 방문하는데 이 신에서 그의 의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아온 그는 베레모에 가죽잠바를 걸치고 있다. 그가 비폭력학생운동에서 킹목사를 지나 이제 블랙팬더당쪽으로 입장이 변화한 것을 보여준다 (블랙팬더당은 포레스트 검프가 흠씬 두들겨 팬 바로 그 당이다ㅎㅎㅎ). 그리고 루이스는 킹 목사가 비폭력저항 철학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평가하며 이제 자신은 풀뿌리,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조 운동, 풀뿌리 지역 운동으로 시작한 블랙팬더당은 점점 더 과격해지고 군사적이 된다. 그 과격함때문에 블랙팬더당을 떠난 아들 루이스는 이제 직접 정치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테네시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다. 루이스는 60-80년대를 관통하는 흑인민권운동의 변화상 집약적으로 아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흑인 임금/승진에 관해 한번 건의했으나 거절 당했던 세실은 다시한번 워너씨에게 이건으로 요청한다. 또 다시 거절당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의 승인을 먼저 받았다. 이 작은 투쟁에 승리한 공로로 그는 영부인이 초대한 만찬에 앉게 된다.
바로 여기서 앞서 나온 "the server-the served"의 메타포가 한번 뒤집혀 등장한다. 앉아서 동일하게 서빙받을 권리를 위해 싸우던 아들, 탁월한 서버였던 자신. 의자에 앉아 흑인 동료들에게 바로 그 서빙을 받는다. 그리곤 “버틀러의 두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백인의 눈으로 보고 그들이 원하는 걸 알아 내야 한다. 뭘 원하는지 알아내려면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들을 미소짓게 하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했던 자신의 두 자아. 버틀러의 두 얼굴. 자신이 평생을 지어왔으며, 백인들의 마음에 들었던 그 표정. 그것을 보게 된다.
서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시점이 바뀌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되고, 이것은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편한 마음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혼란스러움은 그로 하여금 인권역사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들은 범죄자가 아니라, 조국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싸운 영웅임을 확인한다. 평생을 좋아했던 버틀러일이 이제는 달리 보였다. 그렇게 평생을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후 여전히 인권문제로 싸우고 있는 아들을 만나 재회한다.
영화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백악관에 들러온 이야기로 마친다. 케네디가 쓰던 넥타이에 린든 B 존슨이 준 넥타이 핀을 한 세실은 백악관에 초대받아 오바마를 기다린다. 이제 들어갈 그 장소에는 더이상 버틀러의 두 표정도 필요 없고, 불편한 마음으로 다른 버틀러들의 그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마친다.
서버와 서브드의 포옹:
여러모로 아들 루이스는 60-80년대 민권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가상의 인물인 루이스는 테네시의 피스크 대학을 다녔고 비폭력 학생운동, 싯-인, 프리덤 라이드, 셀마행진등에 참여한다. 피스크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학생운동의 지도자였으며 여전히 생존해 있는 존 루이스 John R Lewis (1940- )를 떠올리게 한다. 존 루이스는 당시 중요한 민권운동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영화 셀마 Selma에 킹목사와 셀마에서 만나 운동을 도모 하는 SNCC의 학생지도자 둘 중의 하나가 루이스다). 또 그 아들은 킹목사류의 평화노선뿐 아니라 말콤 X의 강연도 들으러 다니며 블랙팬더, 정치참여 등 대부분의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나온다. 민권운동의 변화상을 한 인물에 담아냈으며, 당시 존재하던 여러 부류의 민권운동을 한 몸에 체화한다.
아버지 세실은 어떤 의미에서 순응적이었으며, 나름의 저항을 해온 평범한 흑인 기성세대다. 노예제는 폐지되었으나 노예와 다름 없던 삶을 살던 남부의 흑인들. 약간의 저항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시대에 백인의 눈으로 보는것만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기성세대였다. 우리는 60-80년대 모든 흑인이 저항했을것 같지만,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한국 민주화 시대 우리네 부모 세대처럼 평범하게 순응적으로 그저 잘 살아냈다. 세실의 아버지는 백인 주인을 화난 표정으로 "헤이"라고 불렀다가 총에 맞았다. 세실은 닉슨대통령이 약속했던 임금인상을 요구했다가 맘에 안들면 나가라는 소릴 들었다. 말콤은 하우스 니거라고 불렀지만, 그 세대는 그들의 이유와 생존 방법이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 마침내 이 둘이 포옹하고 함께 감옥에 갇힌 장면은 아마도 여러 갈래로 전개되어온 흑인민권운동들 사이에, 그리고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평범한 흑인들간의 화해를 상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대들의 투쟁도 모두 의미있으며, 작은 싸움들이 다 모여서 이 일을 이뤄냈다고. 어느 한쪽의 가치도 훼손하지 않으며 모두를 끌어안고 싶었던 시도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의 첫번째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필요한 메시지였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