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 라이드라는 이름의 긴 모험
아틀란타에서 서쪽으로 난 고속도로를 타고 버밍햄을 향해 오다보면, 주경계선을 지나 거의 처음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 애니스턴이 있다. 이 작은 도시에 보고 싶은 장소가 있다. 프리덤 라이더들이 공격당했던 정류소였다.
프리덤 라이더?
미국 남부에서 민권운동이 한참이던 1961년 CORE라는 단체는 워싱턴DC에서부터 인종차별로 악명높은 남부주들을 지나 뉴올리언스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방법으론 공공시설, 특히 주-간 interstate 운송수단에서 분리정책이 금지됐지만, 여전히 남부주들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는것, 정류소 식당에 같이 있는것, 화장실을 같이 쓰는것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남부의 법을 어기며 여행을 해보는게 목적이었다. 이들을 프리덤 라이더라고 부른다.
이 팀의 루트가 남부주들의 핵심인 알라바마를 지나가기에 워낙에 위험한 시도였다. 게다가 같은 버스에 탄 일반인들도 위험에 빠질수 있었기에 분리정책을 반대하던 민권운동단체들 사이에서도 초반에는 반대하는 여론이 컸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이 애틀랜타에서 킹목사를 만나 같이 여행을 하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한다 (후에 한번 더 거절당한다). 그러던게 이 작은 도시 애니스턴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여타 민권단체들의 지지를 받아 국가적 이슈가 된다. CORE의 입지가 올라간것은 덤이다. 이 운동의 결과로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은 남부주들에 공공운송에서 분리정책을 폐지하라고 직접 명령한다.
1961년 5월 4일 DC에서 떠난 팀은 아틀란타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와서 한숨을 돌린다. 민권운동의 영웅인 킹목사를 만나서 환대를 받았지만, 그는 여정을 함께하자는 초대엔 거절한다. 게다가 이 팀이 알라바마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예견한다 (킹목사의 예견은 반만맞다). 사기가 꺾인 바로 그날 저녁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 팀의 디렉터가 아버님의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음날 아침 두대의 버스 (그레이하운드와 트레일웨이)에 나눠탄 13명의 팀원은 한시간 간격으로 다음 목적지 버밍햄을 향해 출발한다. 아틀란타에서 지금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한시간 20분정도 걸리는 애니스톤이 아마도 알라바마에 들어서서 첫 정류장이었을듯 하다 (한국과 달리 버스회사마다 자기 정류장을 따로 가지고 있다).
먼저 출발한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도착해서 정류장에 들어설때 지역 kkk단이 둘러싸 공격을 가했고, 경찰이 와서 겨우 정류장을 벗어났지만 타이어에 펑크를 내서 6마일정도 달리다가 202번 고속도로 가에서 멈춰섰다. 차들 타고 따라온 kkk단들이 창을 깨고 차안에 불을 붙였다. 기름탱크에 불이 붙어 폭발이 있었고, 밖으로 뛰쳐나온 라이더들에게 폭도들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경찰은 느즈막이 나타나선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15분간 폭행을 자유롭게 가하도록 kkk단과 경찰 사이에 이미 약속이 되있었다고 한다).
한시간 늦은 트레일웨이 버스도 애니스톤 정류장에서 올라탄 kkk단에 의해서 버스안에서 폭행을 당했다. 버스뒤쪽 흑인칸으로 이동하라는 경고와 함께. 이들은 차 안에서 심각하게 폭행당한채로 버밍햄까지 이동하게 된다. 차는 불타지 않았지만 버밍햄에 도착해서 더 많은수의 폭도들에게 집단폭행을 - 역시 15분간 경찰의 간섭없이 - 당하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버밍햄에서 심각하게 부상당한채로 더 가려고 했으나, 두 회사 모두 운전자를 구할수가 없어서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뉴올리언스로 가는걸로 합의를 본다. 이렇게 프리덤 라이더 원래 계획은 좌절된다.
하지만 버밍햄 북쪽으로 4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내쉬빌에서 일군의 대학생들이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이 소식을 듣고는 "북부 도시 샌님들이 계획한게 늘 그렇지 뭐"라며 버밍햄으로 내려와 프리덤 라이드 계획을 이어간다. 이 학생들 역시 몽고메리를 지나 미시시피 잭슨까지는 갔지만, 거기서 다 체포된다. 미시시피는 kkk폭도 이런거 없다. 그냥 바로 경찰이 나선다. 체포.
내쉬빌 학생들로 구성된 2차팀도 이렇게 좌절되나 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자발적인 라이더들이 남부의 감옥을 다 채워버리겠다며 잭슨으로 모여들었다. 총 300명 이상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JFK의 동생인) 당시법무장관 Rob Kennedy가 나서서 결국 남부주들에서 공공운수 시설에서 분리정책이 금지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