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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May 31. 2021

도시의 잠 못 드는 밤

삶의 변동이 많은 나날이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일보다 어려운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준비하는 일이다. 후보를 주는 사람은 없다. 각각의 경우를 예상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이며,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경우를 예상하기에 24시간은 너무 짧다. 결국 희생되는 것은 새벽이다. 도시의 잠 못 드는 밤. 


뒤척임을 감추지 못한 새벽, 잠에서 깬 남편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유튜브에서 명상 영상을 하나 켜더니 말했다. 10분을 견디기가 어렵대. 이어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코로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후우 내뱉으라는 권고. 몸의 긴장 하나하나를 인식하고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다독임. 톤이 일정한 목소리. 나른한 여백. 요가 수업을 하며 익숙해진 문장들이었다. 


기나긴 10분이 흘렀고 나는 유튜브를 껐다. 남편의 다정은 고마웠으나 안타깝게도 효과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요즘도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가끔은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의 목소리에 피로해지는 순간이 더 잦아졌다.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은 시기에는 고운 멜로디를 부르는 보컬리스트의 목소리나 스쳐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음조차 피로로 다가왔다. 고요 속에 늘어져 있고 싶은 순간들이, 가끔은 있다. 


사실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좋은 것을 들이마시고 나쁜 것을 내뱉는 일. 깊이 호흡하여 허공을 떠다니는 상상을 붙들어 매고 현실로 돌아오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척이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이 고요 속에 들어앉아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 말해주어야 하는 일이라서. 



좋은 것 하나, 나쁜 것 하나를 떠올리며 천천히 호흡을 반복하다 보면 금세 숨이 고갈된다. 내뱉을 것은 많은데 들이마실 것이 떠오르질 않는다. 자유를 마시고 불안을 뱉는다. 기쁨을 마시고 거북함을 뱉는다. 행복을 마시고 습진을 동반한 손발저림을 뱉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대충 좋은 뭔가를 들이마신 후 호흡을 분할해야 할 만큼 굉장히 긴 문장을 내뱉고 있다. 좋은 것의 빠른 고갈. 그에 비하여 너무나도 넉넉한 부정들. 추상적인 들숨과 과한 디테일의 날숨. 


그러나 나는 그 불균형의 호흡 속에서 잠이 든다. 고른 들숨과 날숨도 없고 나른한 여백도 없으나 진실이 있는 호흡 속에서. 


삶의 변동에는 대개 정해진 일정이 있고, 그날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안정되리라 자신을 위로하지만, 사실 우리는 수십 년에 거쳐 같은 감정을 반복하고 있다. 아마 시험에 붙거나 떨어진 후에도, 이직을 한 후에도, 결혼과 출산을 한 후에도, 우리를 새로운 국면에 던져 넣을 그날이 지나도,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자신의 목소리로. 자꾸만 고갈되는 불균형한 호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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