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반짝임의 순간들
# 귤빛
: 잘 익은 귤의 빛깔과 같이 노란빛을 띤 주황빛.
겨울에 만나는 귤나무는 반짝임을 품고 있습니다. 갈맷빛 잎 사이에서 향기로운 귤빛으로 인사하지요. 추운 계절 입안 가득 퍼지는 새콤한 귤처럼 시린 삶 속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러한 발견의 순간들 덕분에 마음은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갑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도 작은 숨 쉬어갈 수 있고요. 볕뉘에 시선이 닿을 수 있다면, 그늘진 곳에 미치는 그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삶의 층위가 달라집니다.
이 원고를 초고로 써둔 후 운명처럼 만난 드라마가 있습니다. 별 기대 없이 보다 재미없으면 말아야지 했는데 1회는 그다음 시리즈로 걷게 했어요. 맞아요. 달리는 게 아닌 걷게 하는 드라마였습니다. 삶의 슬프고도 따스한 순간들이 퀼트처럼 이어진 서사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었어요. 묵직한 마음의 잔상이 울림을 주는 '폭싹 속았수다'. 그런데 영어 제목이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라고 하는 거예요. 궁금해서 주인공 아이유의 인터뷰를 보니 "인생이 떫은 귤을 던지더라도, 그걸로 귤청을 만들어서 따뜻한 귤차를 만들어 먹자."라는 긍정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하네요.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라는 미국의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의 명언에서 따온 거라고도 하고요.
가난으로 평생 힘든 삶을 보낸 엄마에게 딸은 후회하지 않냐고,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 묻습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엄마는 또 환히 웃으며 "엄마 인생도 나름 쨍쨍했어. 그림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다구. 그러니까 딸이 엄마 인생도 좀 인정해 주라."라는 말과 함께 반짝이는 귤빛 순간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고된 일터로 나가며 인사하는 남편의 눈부신 미소였어요.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또 하루의 힘든 시간을 시작하는 엄마였지만 부부는 서로에게 귤빛 행복을 건넸지요.
"참 이상하게도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래서 몰랐다. 내게는 허기지기만 했던 유년기가 그 허름하기만 한 유년기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든 요새였는지."
딸의 독백이 이토록 마음에 사무치는 건 나의 계절 또한 가을이 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요새를 지켜나가느라 전쟁 같은 삶을 버텨냅니다. 매회 어찌나 웃고 울게 되는지 이제 남은 4막인 겨울은 눈물 속에 진한 여운이 남게 될 것 같은 인생 드라마네요.
행복은 밀도가 아닌 빈도라고 합니다. 물론 깊이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의 밀도 깊은 순간들도 벅차오름을 주지요. 하지만 그조차도 벅찬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요. 삶에서 그러한 순간들은 만나기 어렵고요. 그것만을 기다리다 보면 생이 힘들게만 느껴질 거예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성취하고 갖게 됨이 아닌, 평범해서 흘려보낼 수 있는 순간을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함. 그것이 그들이 행복한 이유이지요.
문득 귤빛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조금만 읽고 자려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맞이한 해돋이. 글을 쓰다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린 카페 창밖을 바라보던 순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반가운 작가의 신간을 만나는 오후.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운전하는 시간. 처음 타는 남산행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밖의 초록과 바람의 어루만짐. 하염없이 바라보는 바다. 무조건 지지해 주시던 아빠와 자식을 위해서면 그 무엇도 해내실 엄마의 마음. 출근하는 내게 한 손을 올려 우는 시늉으로 인사하던 남편의 배웅. 주저앉아 두 팔 벌리면 세상 환한 웃음으로 달려오던 어린 딸들의 눈부신 모습. 고운 한복을 입고 창경궁 안을 장난스레 걷고 있는 성인이 된 두 딸의 뒷모습.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추억들이 귤 상자를 가득 채웁니다. 나이가 들면 좋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처음 살아가는 인생길은 험하기만 해요. 그럴 때마다 상자에서 귤빛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작은 숨 쉬어가며 미소 지을 수 있겠지요. 지친 오늘도 내 삶에 반짝이는 동사의 순간들이 불러봅니다.
가을빛 닮은 한 잔의 커피와 마주 앉은 친구의 웃음.
묵묵히 흐르는 바다와 하염없이 고운 가을.
벤치 옆 나란히 세워진 자전거와 하늘거리는 눈송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조명과
책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
다시 태어나면 아빠와 그때는 100살까지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과
사진 속 언제나 젊은 아빠의 미소.
늘 한결같은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나 빛나는 두 딸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소중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자연의 속삭임과 도시의 소음들.
덜컹거리는 기차와 아이들의 재잘거림.
책에 담긴 작가의 마음과
그림에 담긴 화가의 마음 소리.
가만히 읊조리는 책 읽는 소리와
꾹꾹 눌러 담는 글 쓰는 소리.
오디오북의 따뜻한 문장과
내 마음 따라 흐르는 음악을 듣습니다.
관계에 지치고 살아감이 버거울 때면
글 숲을 거닐며 구멍 난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문장 사이 여백에 담긴 말들과
문장의 향기를 헤아립니다.
닮은 글을 읽으면
문장 사이로 부는 바람이 마음에 닿습니다.
내 안의 스위치가 켜지며 세상이 조금 밝아집니다.
읽고 쓰는 삶을 꿈꾸며 나를 안아줍니다.
유자, 석류, 딸기, 귤.
추운 계절 속에서도 꿈을 열매 맺는
새곰새곰한 겨울 과일처럼
하루하루 꿈꾸는 삶을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