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배고픔>
마음이 위축되면 식욕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허파에서부터 작게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이 뭔가를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그건 배부름과는 무관한 공복감이다. 나 아닌 누군가가 뭐라도 더 먹겠다고 떼를 쓴다. 그냥 기분의 문제인 것 같아서 무시하려고 하지만, 호르몬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는 나약한 놈이 아니다. 처음에는 찬물과 함께 영양제를 먹고, 나중에는 아몬드를 씹어먹지만 그건 근원적인 허기를 채워내는 음식이 아니다. 벌겋고 걸쭉하고 쫀득하고 과하고 펄펄 거리는 뭔가여야만 한다. 가령 마라탕이나 양념치킨 같은 거 있지 않나.
갑자기 닥쳐오는 공복감은 딱히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고픔이다. 배고플 때 내가 찾는 건 보통 라면이지만, 허기가 극심한 날에는 배달의 민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터치 세 번이면 누군가가 닭을 튀기고 무를 챙기고 일사불란하게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는 걸 상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방금까지 찌푸렸던 미간이 펴지면서 비로소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댈 수 있었다. 저녁 내내 억척스럽게 운동한 게 말짱 도루묵이 될 터여도 상관없다. 벨이 울리고 시커먼 옷을 입은 라이더가 방금 튀긴 닭을 문 앞에 두고 떠나면 삭막했던 기분도 헐겁게 탁 트인다.
직장 생활에 지친 나는 늘 치킨을 시켜 먹었다. 치킨을 먹다 보면 목화밭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이 왜 퇴근하면 그렇게 닭튀김에 집착했는지 알만했다. 그때야 먹을게 없어서 목이나 날개같은 살이 없는 부위를 먹을 방법을 찾다가 튀겼다지만, 나는 오직 쾌락의 극대화를 위해 닭튀김을 시켰다. 배달 치킨으로 온 닭은 작고 볼품없었지만, 튀기면 뭐든 맛있었다. 살이 아니라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튀김옷을 먹는 게 좋았다. 먹기 좋은 부위보다 날개와 발, 목 부위가 더 좋았다.
한창 많이 먹을 땐 헬스장도 걸렀다. 상사에게 종일 시달리다 퇴근하면 배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매일 봐야 하는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니 퇴영적인 놈이 되어갔다. KBS 아침마당을 틀어놓고 발기 부전에 고전하는 중년의 아저씨가 하는 말을 듣다가 출근 시간을 놓치기도 했다. 회사에 일찍 도착하면 지하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출근 시간 1분 전까지 버티다 들어갔다. 단 1초도 사무실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면 퇴근을 했다는 안도만큼 내일 출근이 고통스러웠다. 나만 보면 노여워하는 실장은 인간 개조를 시키겠다고 식칼을 들고 덤볐고, 난 일말의 자존심을 세워가며 항변했지만 끝내 고개를 숙이고는 내 목구멍은 포도청이라는 걸 확인했다. 포도청에 붙잡힌 내 목구멍은 계속 사식을 원했다. 굽네치킨 쿠폰이 냉장고를 가득 메웠다.
음식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시기였다. 밤이면 혼자 방에서 음식으로 나를 달랬다. 음식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내가 어떻다 지껄이지도 않았다. 먹을 때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내 체중은 계속 불어났다. 매일 체중계에 오르면서도 무거워지는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치킨 무의 물을 따라내고 허겁지겁 뼈를 발라내며 닭 한 마리를 먹어 치우는 쾌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과식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죄책감과 불쾌함을 잘 알면서도 메마르고 쪼그라든 마음을 감쪽같이 복구해주는 야식의 유혹에 넘어갔다. 항상 배달 온 치킨과 함께 유튜브 교양 채널을 틀어놓지만 보는 둥 마는 둥 오직 발골에 집중했다. 씹고 있던 걸 마저 다 삼키기도 전에 또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는 식이었다.
나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금세 뚱뚱해졌다. 내 몸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불어 나갔고, 숨소리가 쌕쌕거렸다.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더 먹었고 다들 너무 살찐다고 피하는 모든 것까지 먹어 치웠다. 내가 만들어낸 내장 지방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직장에서 심하게 들볶인 날에는 주로 과자를 달고 살았다. 치킨 맛 과자에 피자 맛 과자를 먹었다. 스윙칩에서 치토스와 홈런볼까지 가리지 않았다. 분명히 저녁에 구내식당에서 제육과 상추에 밥을 산더미처럼 먹었는데도 퇴근하면 기운이 없어서 군것질거리를 찾았다. 회사 건물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는 세븐일레븐에 있었고, 난 알바와 눈인사를 하고 몽쉘과 콜라와 신라면을 사서 나왔다. 그 와중에 제로 콜라와 건면을 사며 불편한 기분을 달랬다.
차로 퇴근할 때는 운전을 하다 말고 패밀리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들어갔다. 금요일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가득할 때 난 구석 자리에 앉아서 보통 때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두툼한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가족끼리 오라고 만든 것 같은데, 난 그 흔한 연인 없이도 단골이었다. 아이패드 하나 들고 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를 씹었다. 일주일간 내가 당한 모욕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지만, 실은 그냥 배가 고파서 그랬다. 내 처진 자존심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내 나름의 티지아이 프라이데이를 즐긴 터였다. 당시 내가 가장 애용한 것은 막 나오기 시작한 소셜 커머스 쿠폰이었다. 난 커플 세트를 사서 혼자 2인분을 먹었다. 야근비를 식비로 다 쓰면서 더는 입던 바지가 맞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커피를 달고 살았다. 손에 커피잔이 들리면 뭐든 버틸만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독한 커피를 내려서 링거 사이즈 컵에 담아서 계속 마셨다. 너무 화장실을 자주 가서 담배 피우는 사람보다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땐 옷에 누런 얼룩이 많았는데, 누가 보면 점심에 짬뽕이나 김치찌개를 먹다 흘렸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종일 커피잔을 찰랑거리며 들고 다닌 탓이었다. 퇴근해서도 도롯가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서 블랙커피를 비우고 또 비웠는데, 음식에 곁들여 마시기도 했고 커피만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내게 과도한 카페인 섭취는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탐닉의 대상이었다.
몸이 불어나니 옷 쇼핑도 잦아졌다. 매일 근처 백화점 1층의 자라 매장에 들렀다. 다른 덴 가지도 않고 오직 스페인 스파 브랜드 자라에 가서 옷을 골랐다. 직원들이 날 따라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유니클로보다는 매장이 어두워서 좋았고, 직원들은 불친절했지만 내게 무관심했다. 시장판처럼 켜켜이 쌓인 매대에서 몇 벌을 골라 나 혼자만 있을 수 있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내가 절대 입고 나갈 수 없는 화려한 옷을 걸치고 거울을 바라봤다. 가관이었다. 왜 그랬는지 자꾸만 입어봤다. 자라라는 브랜드가 타깃으로 하는 친구들은 길쭉하고 늘씬한 체형이라서 나는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입지 않을 옷을 사들였다.
지금 와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처럼 무절제하게 살았는지 믿을 수 없다. 스무 해 넘게 유지해오던 체형이 깨어지고, 방종으로 지탱하는 내가 무섭기도 했다. 요즘도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다. 당시에는 이상하게 관능을 향한 욕구가 없었다. 야릇한 충동으로 외로운 밤을 달구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허기만 쨍쨍했다. 나를 위로해줄 상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딱 버림받은 개츠비 꼴이었다. 섹스를 향한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흔하지만 내세울 수 없었다. 섹스에는 훨씬 더 많은 수치심이 붙어 있다. 그저 삶을 충만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인정받기 어려운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허기는 자연스럽게 내세울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고 서로의 온기를 나눠 가지는 순간이 주는 충만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뜨끈한 라면 국물이 주는 따스함은 내가 쉽게 취할 수 있는 온기였다. 꼭 끌어안아 등을 두드려주는 것만이 버티게 하는 밤처럼, 트림하며 거북한 속을 감내하며 애벌레처럼 누워서 자는 밤의 위안도 엄연했다. 치유란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몸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과식도 빼놓을 수 없는 자구책임이 분명했다.
후회하고 자책하고 이를 갈아도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삶의 작동원리인 것 같기도 하다. 굴레와 같은 탐닉이 자아낸 기행은 욕지기라도 내뱉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자아낸다. 돈 낭비에 살만 찌는 야식과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친구와의 술자리가 그렇다. 무엇보다 통제할 수 없는 식욕은 평생 안고 갈 업보처럼 날 따라다닌다. 여전히 간밤의 허기는 버겁고 당황스럽다. 뭐가 그렇게 고프다고 먹어댄단 말인가. 그래도 역겨움이 외로움보다는 더 익숙하고 나아서 여전히 벌건 국물을 후후 불어 마셨다.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다짐은 새해 소망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식욕은 한 번뿐이라는 약속을 무기 삼아 후줄근하게 배어난다. 마치 오랜 세월 유지해온 의식처럼 고칠 수가 없다. 아무리 글에다가 냉소와 자학 더 나아가 혐오를 줄줄이 읊어도 난 다시 라면 물을 올리고야 말 것이다. 관성은 그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려는 인간에게 더없이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다. 익숙함은 힘이 세다. 오늘도 굶고 자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