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인의 <삼십세>라는 시에 이런 시구가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마치 가수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의 가사처럼 지나치게 무겁게 들린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요즘 생애주기로 따지면 갓 대학교를 나와서 겨우 직장에 발붙였을 나이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도 옛말이지 햇병아리 같은 얼굴로 겨우 먹고사는 나이에 무슨 죽음 타령은 어색하다. 생사를 논하기엔 아직 추수한 게 변변찮으니 우선 눈앞에 샛노래진 이삭에 몰두할 나이다. 고전 문학을 읽으면 생애주기가 점점 더 앞당겨지는 기분이 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문호는 아직 뜸도 들지 않은 유예기간에 불과한 서른 즈음에 척척 인생의 중대사를 치러낸다. 난 젊음의 본전도 못 뽑고 늙어버렸는데 그들은 할 거 다 하고도 고작 서른 즈음이다. 인생의 경험치가 잔뜩 쌓여서 이제 쓸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령,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살에 첫 소설을 썼고, 이 작품으로 프랑스 문학비평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결혼해서 서른이 되기 전에 두 번의 이혼을 겪었다. 그는 25살에 첫 남편이었던 ‘기 스콸레르’와 헤어지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혼은 마음 아픈 일이었을 테지만, 스물 중반에 이런 곡절을 겪을 수 있다는 건 작가로선 행운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에는 격랑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마흔 살에 등단하신 故박완서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과 비슷한 경우다. 박완서 작가는 전쟁과 이념 투쟁의 사회변혁을 다 겪고 본격적으로 펜을 드셨다.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박완서 작가는 남은 평생을 소설가로 살며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박완서 작가가 겪은 아픔과 상처는 고스란히 그의 문학으로 탈바꿈했다. 요즘은 정유정 작가처럼 문학과 별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마흔이 넘어 등단하는 경우가 점점 더 잦아지는 추세다. 그만큼 경험과 글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이 스무 살 초입에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놀라운 깊이를 자랑한다. 어린 나이부터 큰 명성을 얻었던 작가는 사랑과 관계를 냉정한 시선으로 감지해낸다.
한국과 달리 다소 느긋해 보이는 저 프랑스 파리의 ‘폴’은 서른여덟의 미혼 여성이다. 직업과 경제력 전반이 안정적이고, 사회 돌아가는 꼴에 몇 마디 말을 얹을 수 있을 정도로 배운 사람이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살며 프랑스 사회의 주류로서 자부심을 느낄만한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평생의 동반자로 믿고 살았던 남자 친구 로제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인생 전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폴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시몽’을 만나 흔들린다.
폴은 늘 밖으로만 돌며 자신에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않는 애인 로제를 믿지 못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 폴의 입장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남녀관계에 관한 심도 높은 사유를 풀어놓는다. 이제 마흔에 가까워진 폴은 자신이 이제 늙었다고 느낀다. 여러 차례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사랑에는 미숙하다. 로제와의 오랜 연인 사이는 헐렁해진 지 오래고, 의욕 과다의 젊은이가 뱉는 우악스러운 낭만도 버겁기만 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자 운동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나이 든 남자 로제는 여자 친구 폴을 두고 수시로 바람을 피운다. 느닷없이 폴에게 반한 젊은이 시몽은 하던 일까지 다 때려치우고 폴 주변을 서성인다. 사랑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의 영역에 있는 걸까. 폴이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행태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비틀스의 명곡 <엘리노어 릭비>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다 보면 사랑을 갈구하는 세 남녀가 전부 외로움에 시달리다 일을 그르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열띤 섹스를 하고 로맨틱한 말을 건네도 그 말에 진심을 담지 못한다. 차오르는 감정과 과장된 수사만 치렁치렁하다. 무엇보다 사랑을 입에 담는 저 자신도 못 미더운 눈치다. 하루 내내 붙어있다가 술 한잔을 하며 속내를 털어놔도 우리 사이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깨닫고 기대를 접는다. 내 고독이 아파서 읊조리면 상대의 목소리는 허여멀건 소음처럼 흩어진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생전에 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농담하세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두죠." 이제 어찌해야 할까. 모두가 각자 다른 방에서 외로움에 져 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멈춰 세우지도 못하는 이 애처로운 꼴을 어찌해야 할까.
늙은 남자 로제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로제는 폴을 영혼의 짝으로 느끼지만, 자신과는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젊고 천박한 여성에게 관능을 느낀다. 그는 욕정으로 말미암은 관계를 짧게 취하고 다시 폴에게 돌아가길 반복한다. 자신의 외도가 관계를 망치는 걸 알면서도 외로운 폴을 방치한다. 그는 오래된 관계가 주는 안정은 취하면서도, 성적 긴장은 다 식어버려서 폴과 함께하는 데 애를 먹는다. 권태와 맞부딪혀 이겨내려는 의지가 없고, 오히려 폴을 대용할 수 있는 가벼운 관계에 탐닉한다. 심각할 것도 그렇다고 몹시 어려운 것도 없는 눈치다.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말도 섞기 싫어서 도망치듯 그녀의 집을 빠져나온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혼자 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어느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시키고 넋을 놓는다. 로제는 시몽과 폴이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폴에게 화를 내진 못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떠나가는 폴을 붙잡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애송이가 아닐까. 그건 마치 콘돔, 담뱃값, 속옷 등을 인위적으로 어질러 놓은 영국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 작품처럼 삶을 방치하는 태도에 가깝다. 어디로든 흘러가겠거니 하며 두 발자국 정도 뒤에 선 방조자의 시선이다.
내가 로제라는 캐릭터에 깊이 몰입했던 이유는 앞날을 어찌 될지 몰라 선택을 미루고 내처진 자유를 버거워하는 모습이 꼭 날 닮아서다. 로제는 고만고만한 일을 하며 젊은 여성이나 꼬시며 사는 걸 낙으로 삼는다. 그는 이제 점잖아져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잊을만하면 닥쳐오는 권태를 어쩌지 못한다. 폴이 유효기간이 지나면 사그라드는 관계의 허무함에 진저리 치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두 사람은 정반대의 두려움을 지닌 연인이다.
폴이 소설의 마지막에 다시 로제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도돌이표를 마주한다. 폴은 젊은 남자 시몽에게 자신이 늙었고 이제 지쳐있음을 고백하며 패배를 시인한다. 마음 같아서는 젊고 유능한 남자 곁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지만, 수군거리는 주위 눈총을 견디지 못한다. 이처럼 가엽고 용기 없는 폴을 바라보는 로제의 마음 역시 복잡하다. 가슴이 답답해진 로제는 이제 더 쉽고 간편해진 외도에 탐닉한다. 관계의 우위에 선 로제는 다시 권태를 피해 달아날 것이다. 폴 역시 허무를 두려워하며 로제의 외도를 모른 척할 것이다. 어질러진 침대는 치울 생각도 없이 베개 옆에 부스러진 감자튀김 조각이나 툭툭 털어내는 꼴이다.
요즘 부쩍 나이 얘기를 많이 한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아니.'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배역이 있다면 늘 진취적인 역할을 맡고 싶지만, 단 한 번뿐인 현실에서는 되레 익숙한 옷에 나를 맞추는 게 편하다. 능동태를 수동태로 전환시키면서 안주한다. 같은 동네 같은 카페만 가는 일상도 편안하게 느낀다. 난 로제와 폴이 관능과 안식의 경계에 발을 걸친 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걸 보면서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모험을 떠나기엔 이제 늙어버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사랑을 말하는 이가 버거워진, 어떤 폐곡선을 그리는 삶.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렇게 등을 기대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는 게 아닐까.
나는 연인이 뭘 원하는지 늘 궁금해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깊고 넓은 대화를 원한다. 어떤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다 얘기해야 마땅하다. 근데 나는 대화 빼고는 다 잘한다. 말이 많은 걸 남자답지 못한 거라고 믿고, 상대를 한낱 소유물로 여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오늘날 수많은 연인이 쉽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까.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이라는 에세이에서 대가족이 해체되고 부부나 연인과 같이 둘만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요즘 풍속을 이렇게 비꼰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 남녀가 다투면 대개 어떤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서로에게 이런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당신은 나랑 대화가 안 돼. 말이 안 통해.' 연인이 서로에게 허술하고 취약한 건 대화를 원하는 여자와 그걸 피하는 남자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폴과 로제의 대화는 잘 들어보면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빗나간 화살과 잘못 그려진 과녁이 어우러진 꼴이다. 이쯤 되면 필립 로스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을 옮기는 게 적절해 보인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는 것이고,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본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린 패배하며 산다. 고생 고생해서 겨우 닿아도 결국엔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