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옆>
난 대체로 다 읽은 책은 선물한다.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다 읽고 나면 책 앞장에 간단한 편지를 써서 수시로 선물한다. 그렇게 책을 뗀다. 이상하게 책을 중고상에 파는 짓은 못하겠더라. 과거에 알라딘에서 내 책들을 처분한 적이 있는데 왠지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동고동락한 녀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기분. 공양미 삼백 석에 딸을 팔아넘긴 심 봉사가 된 기분. 기껏해야 삼천 원 받자고 우리 애들을 시장에 내놓다니. 뭐로 보나 책 선물을 하는 게 있어 보여서 좋다.
선물을 할 때 책을 고르는 기준은 보통 받는 사람의 이미지에 있다. 가령 최근에 <사는 게 뭐라고>라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선물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사노 요코 여사는 쿨하고 너른 마음의 에세이로 유명하다. 이 책을 최근 직장에서 승진 때문에 고생하는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거기엔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고 힘 좀 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물론 받는 상대는 이런 내 생각을 알 턱이 없겠지만, 내 나름의 감별을 통해 책 주인을 정한 셈이다. 그렇게 책이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면 마음이 시큰해진다. 길게는 한 달, 짧게는 며칠을 녀석과 지지고 볶았으니 정이 든 셈이다. 플라토닉과 에로스를 오가며 열띠게 뒹굴었던 이는 몇 가지 기억의 편린을 남겼다가 마음의 틈이 벌어지면 발화한다. 그래, 내가 나중에 큰 집 사면 너희 다 다시 입양해서 내 옆에 두도록 할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서 더 찐한 사랑들 하여라. 그렇게 때 묻은 책이 사라지고 다시 사들인 책으로 메꿔진다. 생태계의 순환처럼 오래된 이야기는 가고 새로운 이야기가 물길을 터 온다.
그 와중에 여전히 나와 이별하지 못한 터줏대감과 같은 책도 있다. 아무래도 선물할 수 없는 그런 녀석들. 늘 옆에 둬야만 직성이 풀리는 존재감을 가진 책들이다.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붉은색 표지를 한 페터 비에리 작가의 <자기 결정>을 이번에 다시 읽었다. 늘 책상 옆 보이는 곳에 둔 책이다. 처음 읽었을 땐 이상한 매혹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표지가 벌게서 그저 홀렸나 싶었지만, 표지빨이라고 하기엔 내가 그은 밑줄이 심상치 않았다. 별이 막 다섯 개씩 쳐져 있고, 형광펜에 메모까지 가득했다. 난 이 철학자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책 귀퉁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혼자 답하고 뭔가 중요한 걸 발견했다고 요란을 떨며 읽었다. 이 책은 왜 내 옆을 지키고 서 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책은 보통 두 종류다. 우선, 기상천외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내용으로 밑줄을 잔뜩 치게끔 하는 책. 그리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라고 중얼거리게 하는 책. <자기 결정>은 전형적인 후자에 속한다.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밑줄을 헤프게 남발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원하는 답을 해주는 책이라서 좋았던 것이다. 근엄하게 생긴 페터 비에리는 문장마다 너 지금 무척 잘살고 있어, 라며 다독여줬다.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책은 몇 가지 어휘로 요약할 수 있다. 몰입, 구체화, 글쓰기, 문학, 언어, 의식화, 삶의 존엄(격).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다 내가 평소에 자주 쓰는 단어들로 이뤄진 책이다. 말하지 않으면 생각은 사라지고, 생각에 듬성듬성하면 정체성도 희미해진다. 삶이라는 게 벼려서 생각하지 않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다. 이때 글쓰기와 문학, 언어의 구체화는 삶의 밀도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금 말하는 자기 결정적 삶이라는 건 뭘까. 우선 자기의 기준이 뭔지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나를 누구로 정의하고 있을까. 바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음... 가장 먼저 머리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건 직업이다. 내 직업이 내 '자기'일까. 내 결정을 좌우하는 근간이 될 수 있을까. '멋이 없어. 너무 세속적이야.' 밥벌이 대신 좀 더 멋진 대답이 필요하다. 이 문제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 나는 나이키 운동복에 거대한 백팩을 등에 이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노트북과 책을 가방이 터져라 욱여넣으며 카페에서 내려주는 에스프레소를 그리워하는 도시인의 모습. 이게 월급쟁이 박 아무개보다 훨씬 더 그럴싸하다. 더 써보자. 즐겨찾기 사이트에는 온통 책과 영화에 관한 것들뿐이고 틈만 나면 뭐라도 읽어야 불안증세가 가시는 병적인 구석이 있는 자. 이건 좀 그런가. 여하튼 결국 나는 나의 '자기'를 취향으로 정의했다. 취향을 갈고닦는 것이 삶을 구체화한다. 내 삶에서 취향을 빼면 뭐가 남을까. 취향 없이는 자존심도 다 무너지고 내가 날 특별하다고 여길만한 근거도 찾기 희박해진다. 돈 버느라 아등바등하는 서른일곱 노총각 역할은 딱 질색이다.
이제 '자기'를 결정했으니 '결정'으로 갈 순서다. 그렇다면 힘겹게 봇짐을 지고 다니면서 난 무엇을 정하고 살까. 설마 정해진 대로 사는 건 아니겠지. 남들 다 하는 대로 취직하고 청약저축을 넣고 어른들이 보기에 있어 보이는 차를 뽑기는 했는데, 이건 다 내 결정이었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타성이 없다고 할 순 없다. 어렸을 적부터 하고 싶었던 글 쓰는 직업도 타성에 젖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구령에 맞춰 발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내 위치도 나아갈 곳도 잃었다. 지금이라도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자꾸만 주먹을 꼭 쥐는 이유도 그 대열 안에서 나오기가 무섭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공격하듯 책의 초반부에는 '자아상'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까마득한 나와 자아상의 간극을 나는 멀뚱히 지켜보며 산다.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다행인 건 미세하게나마 내 '자아상'을 향해 느릿느릿 가는 것 같긴 하다. 수많은 독서 모임을 하고 매일 밤 졸린 눈으로 책을 읽는 건 내 자아상에 도달하기 위한 몸부림과 같다. 너무 과장인가 싶지만, 자아상까지 차가운 도시 남자로 만든 상황에서 더는 돌이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밤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나를 더 나은 작가가 만들기 위한 습작 노트와 같다. 앞서 낸 두 권의 책도 다 늦은 밤에 올린 글에서 나왔다. 물론 아무리 용을 써도 책이 잘 팔리진 않는다. 새 원고를 써야 하는데 통 속도가 붙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초조함도 한몫 거든다. 불안하다. 난 결국 자아상이라는 거구와 샅바를 붙잡고 애를 쓰지만, 종국에 가서는 고꾸라지고 우는 게 아닐까.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생떼를 부리진 않으려나. 이렇게 절절매는 게 다 헛수고가 아닐까. 그래도 결국 업로드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건 임시저장 기능 덕분이다. 내 보잘것없는 자아가 가득 담긴, 형편없이 망가진 그 모습을 임시로 저장해 두고 잠들 수 있으니까. 언제든 내 글은 자아상에 근접할 수 있다. 출근해서 변기에 앉아서도 고칠 수 있다. 저녁이 되어 카페에서 조작하고 보태고 다듬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모습이 나올 때까지 업로드를 늦춘다. 그리고 자정에 다다라 글을 게시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좋아진다. 왜 페터 비에리가 자꾸만 언어로 날 세분화하고 더 자세하게 표현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지 알 것만 같다.
<자기 결정>의 28페이지를 보면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린다는 문장이 있다. 문학을 읽는다는 건 어떤 효용이 있을까. 흔히 하는 말처럼 문학을 통해 이놈 저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걸까. '소확행'처럼 내가 파리나 뉴욕으로 가지 못하니 책이나 읽으면서 만족하라는 걸까. 잔인한 말 같지만, 사실이긴 하다. 나도 지난주에도 런던 배경의 영화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책을 읽으면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했다. 워낙 고해상도라서 지난 유럽 여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로드뷰를 타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여행한 것과 진배없는 여정을 마쳤다. 글 속 화자에 몰입해서 다를 시공간을 거닐었다.
그러니까 난 누군가 왜 소설을 읽느냐고 질문하면, 늘 재밌어서라고 답한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타인의 마음에 들어가서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고 답하기에는 내가 하는 짓이 부끄럽다. 이건 엄연한 기만이지. 내 1인분도 제대로 챙기고 살기가 어려운데 어떤 아량과 도량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한단 말인가.
내가 일상에서 의식하는 문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괜찮으세요 묻는 정도가 다다. 그 정도의 거리감이 내겐 문학이라는 말의 통로다. 문학은 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고한 방법이니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학은 확실한 실질적 쓰임새가 있다. 난 쿨한 척해도 거슬리는 모난 말에 시달리는 타입인데, 웬만하면 헬스장에서 다 풀고 나온다. 그런데도 여진이 남아 계속 괴로울 때가 생긴다. 날 할퀸 말이 속에 남아서 곪는 지경에 이르면 도통 다른데 집중할 수가 없다. 더 가까운 이가 날 더 괴롭히니까. 그럴 땐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주의를 환기한다. 소설은 보통 사랑과 고통을 다루고 있기에 내 문제를 조약돌만 하게 축소한다. 뭐 그렇다고 힐링이 된다느니 다 잊어버릴 수 있다느니 거짓말을 할 순 없고, 그저 잠시 삶과 멀어질 수 있는 '레드선' 역할을 해낸다. 이렇게 쓰고 보니 <자기 결정>은 중고 서점을 매일 들락거리고 영화 티켓값으로 달마다 수십만 원을 지출하는 나를 위한 변명과 같은 책이다.
책의 후반부에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95p. "문화를 아는 것과 체험하는 건 구별해야 한다." 문화를 잘 이해해도 그것이 내 정체성을 이루지 않으면 헛방이다. 말 그대로 머리로만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비겁한 태도다. 에미넴이 가사를 써놓고 정반대로 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정곡을 찌르는 말인 게, 나 역시 상황이 안 좋아지면 이성을 잃고 내 존엄성을 깎아 먹을 말을 뱉는다. 이불 킥을 한다는 건 새벽이 되어서야 내 잘못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다음 날도 멀쩡하다는 건 뒷수습도 방기 했다는 말이다. 난 그 자리에서 사과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늘 속을 끓인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줄 것으로 착각한다. 그건 삶의 격을 떨어뜨리는 게으름이다. 페터 비에리의 말처럼 '언어적 표현'을 제때 해야만 한다. 요즘 흔히 쓰는 카카오톡에서도 정중하고 확실하게 사과해야 한다. 고맙다고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표현해야 한다. 우스갯소리는 유머로 작동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가볍게 치부하는 경우가 많으니 유머가 유머로 동작하기 위한 초석을 다져야 할 시점이다. 진지한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요즘 나의 과제다. 이런 다짐도 아마 내일 아침 회의자료를 작성할 때쯤이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글을 써대야 한다. 아마도 정체성을 이루는 언어적 표현이라는 건 일상의 존엄에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