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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6. 2020

‘키친테이블노블’을 아시나요

글을 쓰고 싶어 지는 세 권의 책

 거리를 걸으면 요란한 네온사인 아래 드문드문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이고, 사납게 치솟은 빌딩 층마다 뭔가에 분주한 굽은 등이 보인다. 자본의 횡포가 적나라한 도시는 시종 매섭게 보이지만, 언제든 우회로를 찾을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잿빛 공기에 숨이 막힐  같아도 밤만 되면 거리엔 서늘한 낭만이 자리하니까.  가끔 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삶을 상상한다. 그들 각자의 내밀한 속사정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늦은 저녁  한구석에 앉아 정적에 휩싸인  뭔가를 적는다. 노트북을 펴고 문장을 이어나가다 보면 기분이 나지고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 수많은 작가들이 이런 키친테이블노블(Kitchen Table Novel) 생계를 꾸렸다. 알다시피 키친테이블노블이란 자신의 식탁 위에서 긁적이는 소설을 말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일찍이 잠자리에  가족 몰래 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며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그의 유일한 일상의 구원은 퇴근  자신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각에도 무수한 이들이 다들 그렇게 쓰고 고치고 망설이다 지우길 반복하며  밤을 보내리라. 바삐 돌아가는 일상은 잠시 잊고 지금 잘살고 있는지 자문하면서 문장을 쌓아 올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늦은  읽기 좋은,  나아가 글을 쓰게 하는 책들에 관해 써보고자 한다. 

일간 이슬아(2018)


 일기를 쓰지 않는다. 한때 열심히 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새해가 되면 빳빳한 다이어리를 사서 만져보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도 두어 달 지나면 자연스레 방치했다. 일기라는 건 매일 하나씩 쓴다는 약속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의미를 상실하니 실로 터무니없다. 내가 탐구생활 쓰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될 턱이 없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글은 그 자체로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일간 이슬아>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용을 차치하고 그 양에 경악했다. 이 정도 분량을 매일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난 질보단 양을 믿는 쪽이라 우선 원고지 15매가 훌쩍 넘어가면 감복한다. 이슬아 작가는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붙이는 전사처럼 보였다. 그가 펴낸 두툼한 단행본을 만져보며 경외를 가졌다. 나의 과거, 내 기억,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 정도로 쏟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멈춰 세우고 문장을 떠올려야 할까. 그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 66번의 반복이 진실을 만든다고 했다던데,  생각에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있어서 작가의 사고체계에 나를 맞추게 된다. 내겐 이동진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스스로 사고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기까지 하다. 때론 눈뜬 이의 장광설도 성경  구절처럼 ‘ 지저스하며 받아들인다.  그걸 텍스트의 주술적 힘이라고 믿는다. 최근 며칠간 자기 전에 <이슬아 수필집> 읽었더니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아침 출근길에서 회사  가로수를  때나, 점심시간에 후배와 농담을 따먹을 때도 그처럼 각별한 단어를 골라내는 내가 느껴진다. 어쩐지 귀엽고 조금은 속된 그런 말이 입가에 맴돈다. 쓰고 싶은  있을  시작하는 글은 서두부터 힘이 넘친다.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을 키보드에 얹기만 해도 문장이 쏟아진다. 이슬아의 글은 삶의 느낌과 감촉을 매만지려는 각오가 키보드에 옮겨 붙도록 날 몰아붙인다.


청춘의 문장들(2004)


 수십 권의 소설을  작가 '스티븐 ' 의하면 글쓰기란 정신 감응이며,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응이라고 적었다. 독서를 하며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나와 저자가  맞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문장의 생김새와 단어를 어루만지며 내가 자연스럽게 그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시종일관 멀리 가지 않고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는 문장이 빼곡하다. 백지만 보면 겁부터 내는  같은 애송이를 위해 이런저런 말을 해준다. 어깨를  치기도 하고, 등을 쓰다듬기도 하면서  첨엔 그런 거라고 구슬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김연수는 서문에서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책에 적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설가로서 지나온 시절들을 털어놓고,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이런 책도 좋아하고, 이런 음악은 끝내주더라 편하게 말을 건다. 평상에 마주 앉아 과자 나부랭이를  깔고 맥주를 들이켜며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떠드는 거다. 어려운  없다며, 안개가 자욱한 바깥 풍경을 보며 문장을 잇지 못해 긍긍하는  같은 인간이 태반이라고. 잔이 비울 새라   따라주 문장콸콸 쏟아진다. 역시 캔보다는 따라주는 재미가 있는 병맥주를 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뭔가 찡해져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짓는 허튼 문장이 무의미로 사라져도 괜찮다고. 매일 비슷한 글을 쓰는  같은 불안감도 그때뿐이라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글에도 밤하늘 영롱한 빛이 있다며.  의심할 새도 없이 다정한 문장에 취해 연거푸 잔을 들이켠다. 김연수 작가가 문청 시절 머물렀던 정릉 꼭대기 하꼬방 경치는  생각과 달리  근사하다. 날씨가 추워 잠바로 목을 여몄다. 그래도 술이  들어가니 취기가 돌아 살만하다. 이런 기분은 글쓰기에 제격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2020)


 작가 제임스 설터는 공군에서 조종사로 복무했고, 이후엔 전업 작가로 살았다. 설터는 비행 기지에서 작전에 투입되는 긴박한 삶에 만족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시간이 부족했다.  문장을 노트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려보며 단어를 골라냈다. 한끝 다르기 위한 다툼의 연속이었고,  짓을 평생 해도 질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막연하게 흘러가는 오후가 온통 문학을 위한 시간이라면 사회에 나가서도 뭐든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고민 끝에 전역을 택한 설터는 허투루 쓰지 않았고,  철이 지나가는 순간을 여러 권에 남겼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가 살아온 시간이 파편처럼 담겨있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기고한 산문 읽다 보면   시간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든다. 자연스레  남성이  코트를 입고 너른 들판에서 뭔가를 적는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평생에 거쳐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 모든 게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난 수많은 이들이 바쁜 일상에도 굳이 흰 노트에 뭔가를 적는 이유를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이 세계에 오직 '개츠비'와 '조르바'의 목소리만 살아남는 건 아니라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다. 설터의 글엔 매일 아침 가방에 소설책을 한 권 챙겨 넣고 하루를 버텨나가는 한 남자의 일상이 담겨있다. 다시 어둑한 작업실로 돌아가기 위해 막 끓은 커피를 잔에 따르는 시간을 녹여낸다. 설터의 문장은 간결하고 단단해서 빈틈이 없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라면 교본처럼 본받을 만한 문장이 가득하다. 설터는 시종 쓸려나가는 누군가의 생을 부여잡고 긍긍한 채 어휘를 고른다. 작가 '랠프 월도 에머슨'이 "문학의 쓸모란 우리 현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우리가 거기에 디디어 움직이는 버팀목을 얻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라 했다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유효기간이 지나면 폐기될 우리의 보잘것없는 삶에 30촉 백열등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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