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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연 May 13. 2016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베트남 하롱베이 HALONG BAY 그림여행

 

가끔씩 나는, 스스로에게 무척 야박하게 군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한다. 인도 여행을 마친 뒤 조만간 다시 떠나겠다던 다짐은, 어쩌다 보니 4년이 흘러버렸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도처에 있었다. 아버지가 아프시거나,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되어 돌봐주어야 한다거나, 전세금이 올라 모아둔 목돈을 써야 한다거나. 분명 최선을 다한 선택들이었는데, 이따금 방에 가만히 앉아 생각하면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다가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목표들, 열심히 해도 따라잡기 힘든 평균의 일상.     


 그러는 사이에 회사에서 ‘장기근속 포상휴가’가 주어졌다. 4일의 휴가와 격려금. 막상 돈과 시간이 주어지니,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이렇게 떠나도 되나?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그냥 이 돈으로 저금이나 하는 게......’

 고민하는 날 보며 친구가 말했다. “그냥 떠나. 그래도 돼. You deserve it!"      


 그래, 떠나야겠다. 아주 조용하고, 배부른 곳으로. (거기에 덧붙여, 이왕이면 체류비가 싸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곳이면 더 좋겠다) 언젠가 광고에서 본 고즈넉한 하롱베이의 풍경이 문득 떠올랐고, 쌀국수를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나는 4박 5일 하노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여행을 결심하는 것이 어려웠지, 막상 떠난다고 결심하자 여행지는 쉽게 정해졌다. 나의 여행을 응원하던 친구는 나를 위해 여행자 보험을 들어주었다.     



여행의 첫날, 나의 모습을 그린다. 실물보다 일부러 예쁘고 젊게 그렸다. 왜냐하면 지금 나의 마음이 딱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나게 된 베트남. 

 비행기에서 내리자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공기, 공항 바닥의 끈적거림, 낯선 언어들. 어깨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배낭의 무게 속에서 나는 내가 ‘여행자’의 위치로 돌아왔음을 느낀다. 

 늦은 오후, 하노이 구시가지에 도착해 로컬 여행사에 들러 바로 다음날 출발하는 하롱베이 투어를 신청했다. 다행스럽게도 1박 2일 크루즈 투어의 마지막 한자리가 남아있다. 예약을 마치고 나니, 이미 거리는 어둑어둑해졌다. 숙소로 가는 길 성 요셉 성당 근처의 허름한 가게에 들러 쌀국수를 하나 시켰다.


 저가 항공을 이용한 까닭에, 그 밤의 쌀국수는 그날의 첫 식사였다. 배가 고파서였을까. 뜨거운 국물을 넘기자 콧물이 찔끔 난다. 괜히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낯선 식당에 쪼그리고 앉아, 이방인이 되어 쌀국수를 먹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행복은 포만감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뜨겁고 배부르고 또 가슴이 턱 풀린다. 배낭은 무겁지만, 마음만은 첫 배낭여행을 떠났던 스무 살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픽업 버스가 호텔에 도착하기 전, 간단히 아침을 먹고 산책을 했다. 낯선 곳의 아침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빵과 과일 장수들이 바구니를 들고 조용조용히 거리를 채운다. 소란스러운 주말 야시장과 술자리의 흔적은 사라지고, 일상의 모습이 거리를 채운다.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현지인을 바라보면, 서울에서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특별할 것이 없는 부지런한 일상이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흐리다.

 '비가 오면 안 되는데...... 그렇지만 흐린 날씨는 흐린 대로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노이에서 픽업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 시골길을 달려,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커다란 배들이 늘어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여행객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 배에 올랐다. 간간히 비를 뿌리던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배가 움직이자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볼에 닿았다. 


하롱베이(Halong bay, 할롱 만)는 베트남 북부와 중국 사이에 있는 꽝닌 성 통킹 만을 일컫는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왔을 때, 용이 적을 물리친 뒤 입으로 보석과 구슬을 토했는데, 그것들이 바위로 변해 섬이 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석회암들이 풍화작용으로 깎여 나가며, 지금의 수많은 섬이 되었고 그 수는 3000개에 달한다. 1994년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실 내가 하롱베이를 오게 된 건, 순전히 모 항공사의 광고 때문이었다. 안개를 뚫고 솟은 수천 개의 섬, 소박하면서도 고요한 풍경. 섬 사이를 흘러가는 배의 모습. 어릴 때 그 광고를 보면서 이른 새벽 혹은 아주 늦은 밤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섬을 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었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섬들이 펼쳐졌다. 작은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계속 눈앞에 펼쳐졌다. ‘아. 여기가 하롱베이인 건가?’      

 섬 하나하나를 바라보면, 하롱베이 섬의 규모는 큰 편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바다는 넓었고, 그 넓은 바다로 나가면 끝없이, 끝없이 새로운 섬이 나타났다. 하나의 섬이 가면, 또 다른 섬들이 겹겹이 나타났다. 배를 타고 아무리 나아가도 섬은 끊임없이 솟아났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섬의 크기가 아니라 꿋꿋하게 나타나는 무수한 섬의 개수였다.



 

느긋한 크루즈 위 선베드



 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배는 천천히 흘러갔다. 오후에 잠깐 카약을 탄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어 남는 시간에는 섬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프랑스에서 왔다는 올리비에가  묻는다.

 '벌써 지나간 섬들은 어떻게 그리는 거야?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하나의 섬이 가면, 또 다른 섬이 오니까. 그렇게 시작과 끝이 조금 다른 섬을 그리고 있어'    

 밤이 되자 크루즈는 바다 한 가운데에 배를 세웠다. 저렴한 패키지를 이용한 까닭인지, 가라오케나 바비큐 파티는 없었다. 대신 조금 떨어진 다른 배에서 누군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리처드 막스 Richard Marx의 Right here waiting이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까만 바다에 파란 전등을 띄워두고 낚시를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물고기들은 노래 가락처럼 무심히 지나갈 뿐, 미끼를 물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달빛 아래 병풍처럼 섬들이 아른거렸다. 공짜로 나눠준 드래프트 맥주는 쓰고 묵직한 맛이 났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새벽에 일찍 눈을 떠 갑판으로 올라 해가 뜨기를 기다렸지만, 안개 낀 날씨 때문에 일출은 볼 수 없었다.    

 

 하롱베이 투어는 내가 기대한 풍경들은 아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꽤 분위기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크진 않지만 수천 개의 섬은 그 나름의 멋이 있었고, 처음 배를 탔을 땐 외로웠지만, 헤어질 때는 올리비에를 만나러 꼭 프랑스에 놀러 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결심을 실행하는 일은 4년보다 적게 걸리기를!) 

 

그래. 여행에서의 예상과 결과가 늘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림이 시작과 끝이 조금 달라도 괜찮은 것처럼.  


   










시작과 끝이 조금 다른, halong bay의 모습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쩐꿕사당을 걸으며 현지인들이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당 앞에는 인도 보드가야에서 일부를 잘라 가져와 심었다는 보리수나무가 커다랗게 늘어져 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때 그늘막이 되어주었다는 바로 그 나무이다. 이 짧은 여행에서 나도 무엇인가를 깨달았을까?     


 해가 높이 떠올랐을 때, 근처의 하일랜드 커피에서 연유를 잔뜩 넣은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호수는 평화롭고, 커피는 맛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노트와 물감이 있다. 문득 모든 것이 고맙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해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그 모든 여행의 흔적들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 











베트남 음식은 천국이다. 삼시세끼 챙겨먹어도 다 못 먹은 맛있는 음식들
영수증과 티켓들, 손에 잡히는 질감있는 기억들.
거리는 유럽, 물가는 동남아, 음식은 천국. 이 말에 동의합니다.
혼자 마셔서 조금은 쓸쓸했던 하노이 맥주와 감자칩
빨간 볼과 곱슬 머리, 처음과는 다른 모습. 나의 마음도 조금은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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