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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nar G May 13. 2016

그 섬이 건넨 이야기

 떠나야 할 때가 왔나 보다. 심장이 삐걱거린다. 눈물을 터뜨리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눈은 말라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어쩐지 불안하다. 힘든 상황에서 힘들지 않다고 하는 건, 병이다. 이럴 때의 극약처방은 여행이다. 

 모든 게 엉망인 때에 비행기를 타는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한숨이 인다. 여행길에 오를 만큼 열심히 살아왔는지에 대한 반성도 스친다. 망설임 속, 그 섬이 눈앞을 지나간다. 바닷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상념은 뒤로 하자. 비행기에 오르는 게 먼저다. 몸에 익은 이곳을 벗어나면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루한 전쟁에 대한 결론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청춘의 열정을 다 먹고도 한 줄의 답도 주지 않았던 꿈. 그 냉담한 등에 대고 눈물이라도 덜어내야 앞이 보일 것 같아 비행기를 탄다. 왜 하필 나오시마였는지는 모르겠다. 버려진 쓰레기 섬에서 예술 섬으로 재탄생한 나오시마가 나와 닮아서였는지, 좋아하는 작가들이 날 이끈 것인지, 이별 여행이 될지 재시작 여행이 될지. 답은 섬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오사카에서 오카야마를 거쳐 배를 타고 나오시마로 들어간다. 둘레 16km의 나오시마는 산업폐기물로 가득찬 버려진 섬이었다. 황무지가 되어가는 섬에 대한 가가와 현청의 우려와 베네세 그룹의 후원으로 나오시마는 1989년 이후 예술의 섬으로 거듭났다. 예술섬으로의 재탄생이라는 계획에 맞게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쿠사마 야요이(草間弥生) 이우환 등의 대가들 작품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꿈과의 이별이 될지 재도약이 될지 모를 여행길, 펜과 노트를 손에 쥔다. 배 안에서 저려오는 손을 움직여가며 빈 노트를 채운다. 미뤄둔 생각이 봇물 터지듯 터진다. 고통스러운 행복 속에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써 내려간다. 시, 산문, 외국어, 그림, 기호. 사고가 뱉어내는 형태는 다양하다. 생각의 필경사 역할을 하는 사이 배는 섬에 닿아있다. 

 

바다와 하늘, 푸른 잔디와 은색 의자를 배경으로 놓인 대형 호박이 눈에 들어온다. 은색, 붉은색, 검은색, 녹색의 탁월한 대비에 감탄하며 호박을 향해 걸어간다. 둥근 점으로 장식된 호박 앞에 서자 숨통이 트인다. 각진 짧은 단발머리에 원색 의상을 즐겨 입는 작가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는 정신병원과 작업실을 오가며 활동하는 일본 작가다. 선과 면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향해 그녀가 건네는 말은 점의 언어다. 줄서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점의 이야기. 그녀의 비범함을 정신병으로 단정했던 세상은 정신병원을 거쳐 탄생한 그녀의 작품에 이젠 열광한다.

 

 직선 세상에서 꿋꿋이 원형의 우주를 구축해 온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나오시마와의 첫 만남에서 거대 호박에 뚫린 구멍들을 선물로 받는다. 검게 채색된 호박 속에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어둠과 빛이 만들어내는 평온함에 둘러싸여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 본다. 어깨가 뻐근하다. 어둠에 놓이는 빛의 자수(刺繡)가 황홀한 광경을 선사한다. 햇살이 구멍을 통해 쏟아지며 ‘꿈꾸길 잘했다, 타협하지 않아 다행이다’고 귀에 속삭인다. 원이 담아내는 바다 풍경까지 곁들여지자 호박은 어둠의 갤러리로 재탄생한다. 라인 타기를 강요하는 세상보다는 아무래도 동그란 세상이 더 좋다, 모난 세상에서 잘도 버텨왔다는 생각이 어깨를 다독인다.   


 붓카케우동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다. 자전거와 버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버스에 오른다. 작품에 대한 조바심이 자전거 여행의 여유를 이긴 것이다. 

 예술 섬으로 기획된 나오시마는 곳곳이 미술관이다. 지중미술관, 베네세 뮤지엄, 이우환 미술관 외에도 빈집을 예술로 탄생시킨 이에 프로젝트의 갤러리들도 있다. 혼무라의 일곱 채 작품 중 몇몇을 눈에 담으며 지중미술관으로 향한다. 나를 이 섬으로 이끈 또 한 사람,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때 복싱 선수이기도 했던 독학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직접 보고 공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건물을 만나면 꿈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도 그려 볼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으로 발길을 옮긴다. 건물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라는 지중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모네(Monet)의 정원을 옮겨 놓은 꽃길에 들어선다. 색색의 꽃들이 피워내는 향기와 기분 좋은 바람이 자전거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든다. 자전거를 지나와 꽃 앞에서 셔터를 누르던 길동무들과 함께 지중 미술관에 이른다.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회색 콘크리트와 바다, 정체 모를 향기와 주변 풍경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액자 같은 구멍. 땅 속에 건물을 들어 앉혔다는 지중 미술관의 첫인상이다. 긴 통로를 수놓은 빛과 서늘한 바람. 하늘이 없는데도 하늘이 보이고 태양이 보이지 않는데도 햇살이 느껴지는 건물 속에서 안도 다다오의 손길을 느낀다. 각진 건물이 관람객들의 발소리를 조용히 담아낸다. 액자처럼 뚫린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볼을 쓸고 간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안도 다다오의 건물에서 더없이 따듯한 온기를 느낀다. 차갑게 느껴져야 할 회색 건물이 더없이 인간적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공공건물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건물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귀를 간질이는 공간의 울림을 따라 발을 옮긴다. 새하얀 방에 모네가 있다. 벽을 빙 둘러 걸린 모네의 <수련> 연작과 하얀 벽, 그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빛. 숨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운 고요한 미술관에서 그림이 전하는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모네와 안도 다다오가 만들어낸 연못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는다. 대작 앞에서는 감탄사도 필요 없는 모양이다. 관람객들 모두 조용히 그림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캔버스에 담긴 연못물이 좌측에서 중앙을 거쳐 오른쪽으로 흐른다. 백색 벽을 타고 내린 빛이 수련 위에 드리운다. 시간이 멎는가 싶더니 공간이 무한대로 확장된다. 캔버스를 둘러싼 흰 벽과 빛이 모네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동양의 여백미를 더해준다. 서양의 쌓음과 동양의 덜어냄의 조화, 탁월하다는 말은 이런 때에 사용해야 되는 말이다. 인상파 화가 특별전 같은 전시회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할 전율이 온몸을 쓸고 간다.

 

Open Field_James Turrel l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모네의 전율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복도를 지나온다. 복도 끝에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이 있다. 어쩐지 성의 없어 보이는 설치 작품들. 제임스 터렐이 설치 작품에서는 깊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거라는 내 편견을 깨고 들어온다. 파란 화면과 계단이 전부로 보이는 작품 <Open Field>. 설치작품은 어쩔 수 없다며 돌아서려는 때, <Open Field>가 불현듯 나를 삼킨다. 스크린의 경계에 이르자 화면으로 보였던 벽이 공간이 되어 펼쳐진다. 차원에 대한 내 관념도 함께 허물어진다.

 벽이라 여겼던 스크린의 경사진 바닥을 밟으며 틀에 대해 생각한다. ‘틀을 설정한 건 나였다. 누구도 그 틀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깨우침이 나를 쓸고 간다. 어느 분야건 직접 뛰어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있다. 고개만 내밀어 들여다본 걸 전부라 믿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오만이다. 평면의 깊이를 선사한 제임스 터렐. 그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파란 방을 나선다.

  

Time, Timeless, No Time_Walter De Maria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마지막은 월터 드 마리아 (Walter De Maria)다. 하늘 걷는 듯한 착각에서 벗어나기 전 월터 드 마리아가 진짜 하늘을 지상으로 가져다준다. 뻥 뚫린 천장 아래서 관람객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구멍 하나 나 있을 뿐인데 하늘은 있는 그대로 작품이 되어 눈에 들어온다. 감동의 여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Time, Timeless, No Time>을 찬찬히 둘러본다. 탄식 같은 한숨이 터진다. 사면을 둘러 서 있는 금색 구조물과 길게 이어진 계단 가운데 위치한 검은 구, 뚫린 천장과 구에 담긴 하늘. 관객들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이 된다. 월터 드 마리아의 검은 구를 통해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난다. 모네의 방이 허물어버린 이 차원의 한계와 제임스 터렐의 차원 파괴, 월터 드 마리아의 검은 구가 어우러지자 내가 발 딛고 있는 공간은 우주로 확장되어 간다. 그 구심점에 내가 서있다.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섬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든 땅 속 미술관인 지중(地中)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경건하고 벅찬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온다. 차오르는 눈물 속에서 노을을 맞는다. 바다와 노을이 빚어내는 풍경이 감동으로 얼얼해진 가슴을 다독인다. 석양과 누런 바다와 팔짱 낀 연인들과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 그 순간을 남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셔터를 몇 번을 눌러도 넘쳐흐르는 감동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사진이 아쉽다. 서둘러 노트를 꺼내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글로 그리는 그림. 추억이 되어 남겨질 감동을 글에 담는다. 종이를 채운 글만큼 눈물도 함께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섬도 한때는 쓰레기 섬이었다.' 예술 섬으로 다시 태어나 준 나오시마가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월터 드 마리아와 제임스 터렐, 안도 다다오와 모네에 둘러싸여 돌아오는 길, 감당할 수 없는 감동에 불현듯 허기가 몰려온다. 편의점에서 산 젤리를 씹으며 서둘러 이우환 미술관으로 향한다. 바위와 철의 이야기, 파도와 바람의 속삭임을 덤덤하게 담아낸 작가 이우환.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 심장 멎게 했던 <Relatum-Dialogue>의 감동은 <Relatum-Shadow of Stone>에서 끝내 내 무릎을 꿇리고 만다. 

이우환 미술관 출처 http://benesse-artsite.jp/en/

 주의 기울여 관찰하고 곱씹어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가 이우환의 작품에 담겨있다. 자연 이 품고 있는 사연을 인간의 눈으로 풀어낸 이우환의 작품에서 존재로서의 겸허를 배운다. 


 미술관을 나오니 날은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다.

   

 파도와 바람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섬 나오시마. 섬에서 만났던 수많은 작가들의 사연. 나와 비슷한 길을 택한 고독한 작가들의 작품이 등을 다독여준다. 베네세 뮤지엄의 니키 드 생 팔(Niki De Saint Phalle) 작품에 둘러 싸여 왜 그 섬이어야 했는지 무엇이 나를 그곳까지 이끌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앞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 가슴은 더없이 따뜻하다. 

 미약한 내 존재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때 찾았던 나오시마, 멀어지는 청춘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에 뒤흔들리던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섬. 버려진 섬을 예술 섬으로 탄생시킨 대가들의 손길과 쇼이치로 회장의 의지가 가슴을 두드린다. 

 세상 어디에도 쓸모없는 장소는 없다. 편견과 무관심이 장소의 본래성을 훼손하고 가능성을 짓밟고 있을 뿐이다. 비행기에 열차, 배까지 타고 와서야 이를 수 있었던 섬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날 규정하는 어떤 것도 없는 외딴섬에서 비로소 내 맨눈을 마주 보았다. 보잘 것 없고 가치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알아봐주지 않았을 뿐 나는 분명 값진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 봐주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감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꿈의 섬에 이르기 위해 긴 길을 둘러온 것처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식으로 사는 섬 같은 존재도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섬을 버려버릴지 예술로 탄생시킬지는 내 선택과 의지의 문제다. 

 펜을 내려두려 온 여행, 섬을 나오는 내 손에는 펜과 노트가 쥐어져 있다. 섬은 내 빈 종이 위에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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