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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연 Oct 06. 2018

나인 것이다.

외롭고 동시에 행복한

체코, 프라하.

여행 9일 차,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어제 들렀던 카페를 다시 찾아갔지만, 주말이라서 오늘은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커피와 샌드위치를 포장해 거리로 나왔다. 노을이 지는 강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것도 근사할 것 같았다. 빵과 커피를 들고 강변 벤치에 앉은 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추위와 함께 느껴진 것은 '외로움'이었다. 빵 부스러기 때문에 발 밑으로는 자꾸 비둘기가 모여들었다. (첫날 다짐은 잊고서) 빨간 발의 비둘기를 보고 있으니 처량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참 막막하고 예쁘다' 

오늘 밤엔 어디로 가야 할지, 호스텔로 가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혼자 바에 가자니 용기가 나지 않고, 막막한 내 마음과는 달리 눈 앞의 밤 풍경은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다. 강 표면을 따라 빛은 흐르고 있었다. 

체코에서 가장 길다는 블타바 강은 성큼성큼 앞으로 잘만 흘러가는데,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막막한 아름다움이 내 안으로 흘러와 바닥까지 헤집어 놓는다. 입 안에서 많은 감탄사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내 속으로 잠겼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소리로 울리지 않고, 오직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아름다워서 더 외로워지는 아이러니함이란. 이 아름다움을 비둘기와 함께 나누어야 하다니.


혼자 다니는 여행은 여러모로 편하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어디든 앉아 그림을 그리고, 나에게만 맞추어 일정을 정한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힘들까? 여행 내내 많이 걸었더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초봄, 프라하는 춥고 내 옷은 얇았다.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손이 시려서 한참을 비벼야 했다. 너무 많이 걸어서인지, 밖에서 너무 오래 있어 추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배가 고픈 걸까? 외로운 걸까? 행복하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구구구구구. 비둘기야 너는 아니? 




샌드위치를 대충 욱여넣고, 다시 구시가지로 걸어갔다. 혼자라는 게 싫다. 그렇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자, 길을 걸으면서도 자꾸 상점 안을 바라보게 된다. 따뜻한 조명 아래 눈을 마주치며 앉아있는 사람들,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비둘기와 나누었던 감탄사들. 오로지 나 혼자 기억하게 될 경험들. 마치 커다란 무대에서 혼자 춤을 추는 기분이다. 이리저리 팔을 휘둘러 보지만 도무지 흥이 오르지 않는다. 나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세상에 좋아져 인터넷 여행 카페에서 당일 동행을 구해 밥을 먹거나 재즈바에 가는 사람이 많았다. '프라하 저녁'이라고 검색을 하면 하루에도 글이 여러 개 올라왔다. 몇 번 카페에 접속해 검색하다가 다시 나왔다. 글을 올린 대부분이 나보다 한참 어린 20대 중반이었다. 

'저흰 스물여덟 살 남자 두 명이예요'라는 말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안녕하세요? 전 서른여섯이에요.' 나이 많은 내가 나오면 얼마나 놀랄까. 어색한 식사를 하느니, 차라리 비둘기와 조용히 밥을 먹겠다.


결국 나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맥주를 한잔 시키고 루이저 린제의 '생의 한가운데'의 한 구절을 읽었다. 하필이면, 너무나 시의적절하게도 이런 문장이 이어졌다. 


"니나는 조금 웃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내 팔을 잡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아니야, 나는 조금도 불만스럽지 않아. 나는 달라지고 싶지 않아. 나는 결코 안정을 바라지 않아.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가끔 저녁에 거리로 나갈  때가 있어. 특히 여름날 저녁때 그래. 그러고는 전등이 켜 있고 라디오 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안이나 정원을 들여다보곤 해. 거기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지. 그러면 나는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게 잘해 주고, 내가 의지하고, 밤에는 안아줄 한 남자에 대해서 끔찍하리만치 강렬한 동경을 느껴. 그리고 정원 울타리에 기대어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거야. 나는 몇 번이나 운명으로부터 그런 것을 제공받고도 왜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나는 마치 집 잃은 개처럼 여기 서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에게 이 모든 것을 유예시킨 것은 운명이나, 혹은 언니가 이름 붙이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 원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나였어. 그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었어."

-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그래. 나는 왜 길 잃은 개처럼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결정을 유보한 채로. 길 위에서 이렇게. 상점을 흘깃거리면서 이렇게.

니나의 입을 빌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게 나야. 그리고 나는 달라지고 싶지 않아.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나였어" 스스로 니나처럼 고집이 세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냥 이런 내가 되어있었다. 어쩌다 흘러온 곳이 아름답고 외로운 이 골목이라면 나는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결혼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나 행동이 없는 내가, 앞으로 어쩌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만 선시장에 나가서 잘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쩌다 만남이 계속 이어질 때면 덜컥 겁부터 났다. 이렇게 대충 조건 맞춰서 결혼해도 되는 것일까, 후회하지 않을까, 하고.


그러면 평생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린다. "그러게. 사실 나도 그게 겁이 나." 변명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은 소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으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근데, 지금이 무척 행복하기도 해." 

외롭지만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운 블타바 강과 골목처럼, 내 인생도 그렇다.


오늘은 내가 프라하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이고,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기다린다. 나는 온라인 게시판을 들락거리는 대신, 모두 곤히 잠든 한국의 새벽을 향해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기념품점에서 사두었던 예쁜 엽서를 꺼내 보고 싶은 이들에게  프라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직 비둘기만 들어주었던 나의 감탄사들을, 나의 외로움들을 꾹꾹 눌러 적었다. 맥주 때문일까, 엽서를 쓰다 보니  어느새 몸이 따뜻해졌다.


일요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프라하의 우체국은 늦은 밤까지 열려있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나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며 우체국에 온 몇몇 사람들에게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인터넷으로 뚝딱 메일을 보내는 이런 시대에도 밤늦도록 문을 열어두는 우체국이라니. 한 밤중에 편지를 보내려고 이 곳에 온 우리들이라니.


외롭고 심심했던 프라하이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좋은 여행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프라하의 아름다움은 나를 외롭게도 했지만 또 충분히 행복하게 했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무장해제되어 내 가장 아래쪽 진심, 외로움과 그리움까지 닿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냈던 엽서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상하게 이 곳은 참 외로웠어요. 하지만 외롭다고 해서 그게 꼭 불행한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외롭고 행복한 곳이네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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