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동안이라고요?
호의가 별로 효과적인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프라하 현지 투어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제일 어린 사람의 나이를 듣고선 나랑 띠동갑이네,라고 내가 말했을 때 (나머지 세 명이서 짠 것처럼 동시에) "어머! 그렇게 안 보여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 나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동안이나 노안도 크게 상관없을 텐데, 칭찬이라고 건네는 말에 오히려 '아. 이 아이들이 생각하는 서른여섯은 엄청 많은 나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눈치 없는 나는 "그렇게 안 보여도 뭐 서른여섯 살인데... "라는 궁상맞은 말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어버렸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어려 보여요'라는 말을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들어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 저 아이들은 내 또래를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스무두 살과 스물세 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서른다섯 살과 서른여섯 살을 잘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나이에서 멀어질수록 감은 떨어지니까.
스무 살이 보는 서른여섯 살은 그냥... 어마하게 먼 느낌일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가 추천해준 현지 음식점에서 앉아, 꼴레뇨(체코식 족발), 굴라쉬(체코식 쇠고기 수프와 빵), 파스타를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앞두고 유럽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 공항에서 캐리어가 부서져 여행 내내 고생했다는 이야기, 런던에서 스마트폰을 도둑맞은 이야기들. 모두 나보다 먼저 유럽에 왔고, 앞으로 여행할 날도 더 많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여행 다녀요!" 20대 때 여행지에서 내가 주로 듣던 이야기다.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여행할 시간이 없어지거든!" 그때는 별로 와 닿지 않던 충고들.
스무 살의 내가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던 기억은, 여전히 내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 스마트폰은 커녕 로밍도 되지 않는 시절이라서, 전화카드를 사서 카오산 로드에서 부모님께 전화했던 기억, 한국인이 많지 않던 소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쁘다고 칭찬해주었던 일(태국에서는 하얗고 통통한 사람이 미녀였다), 여행에서 만난 오빠들이 컵라면을 나누어주며 걱정해주던 것들, 밤새도록 클럽에서 요상한 춤을 추던 우리들, 에매랄드 빛 바다에서 등껍질이 다 벗겨지도록 스노클링을 했던 기억들.
나는 그때의 내가 너무 신났던 것이 기억이 나서, 어린 친구들이 여행을 하러 다니는 것들을 보면 '지금 저 아이들이 보는 세계는 또 얼마나 근사할까'라는 질투심이 들어서 어쩔 줄 모를 때가 있다.
문득 생각한다. 과연 지금 느끼는 아쉬움으로, 누군가에게 충고를 한다는 게 옳은 일일까? 뜬 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이왕이면 멋진 말을 해주고 싶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나의 충고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없었으니까, 꼰대처럼 굴지 않으려고 그들의 신나는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족발을 뜯고 맥주를 삼켰다.
프라하의 생맥주는 기가 막히게 고소했다. 맥주를 두 잔 연달아 비우고 나니 속이 더부룩해졌다. 나는 재즈바를 함께 가자는 아이들의 권유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자 배를 찌르던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호스텔에 누워서 배를 어루만지며 스무 살의 내가, 삼십 대 중반 혼자 온 여행자를 바라보던 일을 떠올린다.
우와... 상당히 나이 많은 여자가... 혼자서... 호스텔에 묵으며 여행을 한다.
'왜, 저 나이에, 혼자서, (호텔도 아니고) 호스텔에 있는 거지?'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에는 스스로가 너무 반짝거려서, 나이 많은 여행자들은 멋있다는 생각보다 측은하고 처량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여행자들 사이에서 느낀 불편함은, 결국 자격지심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측은한가? 정말 괜찮은 걸까? 호스텔 천장으로 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다음날 아침 하늘은 흐렸고, 나는 쓸쓸한 마음으로 눈을 떴다. 이렇게 하루를 날려버릴 수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그림도구를 챙겨 버스를 타고 다시 프라하 성으로 올랐다. 발드슈테윤스카 정원 Wallenstein Garden에서 프라하성으로 걸어가는 동안 차츰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성벽에 서서 구시가지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들어오자 주황색의 지붕들과 에메랄드빛 첨탑이 선명해지면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성벽에 기대어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사진 찍어줘도 될까? 네가 그림 그리는 장면이 너무 멋진 것 같아서."
그는 내 카메라를 달라고 하더니,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림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보라며 나름의 연출 샷까지 찍었다. 한번 확인해보라며 카메라를 건네주었는데, 그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나는 그의 말처럼 멋졌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게 멋있다고? 정말...?"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 속의 나는 무척 추워 보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여러 벌의 겉옷들을 겹쳐 입고, 스카프와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어서 마치 비둘기를 몰고 다닐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뭐라고 계속 수다스럽게 말을 했는데, 너무 빨리 말해서인지 내 몰골의 충격 때문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프라하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소리 내어 웃었던 순간이다.
그는 나에게 (초라해 보이지만 사실은 멋있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짤막한 백팩을 멘 채로 유유히 사라졌다.
아마 이번 여행이 끝나면 이 곳의 무언가는 잊고, 또 무언가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장면이 오랫동안 남게 될지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그를 만난 기억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내 삶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일을, 혹은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바라볼까 봐 움츠러드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동안이라는 칭찬을 몇 번이나 꼬아 생각하는 못난 짓을 그만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과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그런 내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큰 위로가 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내가 서른여섯 살보다 어려 보인다고 말한다. (아마 서른다섯 살 쯤으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여행할 때의 내가, 그림을 그릴 때의 내가 좋다.
어디선가 내가 짐작도 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지. 나와 다른 삶을 사는 그에게 멋있다고 말해주어야지. 그와 헤어진 뒤 다시 성벽에 기대어 섰을 때 프라하 성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아주 시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