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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래 Sep 02. 2022

당신은 지난 인생에서 며칠을 기억하는가

여행하고 싶은 이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며칠을 기억하는가.

벌써 30년 넘게 살아왔다. 10,000일이 넘는 시간이다. 오늘은 2022년 9월 2일이다. 벌써 2022년이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2/3가 지나갔다.


살아온 날들이 길어지면서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고 느낀다. 생생히 기억나는 날들은 많지 않다. 2021년 9월 2일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2020년 9월 2일에는? 2018년 9월 2일이나 2012년 9월 2일, 2007년 9월 2일은 어떤가?


2016년 12월에 이 영화를 보고 너무 감명받았고, 이듬해에 LA 여행을 가서 두 주인공이 춤춘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했다.


내가 흘려보낸 대부분의 날들은 그냥 흩어졌다. 그것도 소중한 일상이었겠지만 속절없이 지나간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이벤트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남자 친구와 사귀기 시작한 날, 라라 랜드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 처음 테니스를 배우던 짜릿함, 이직 후 첫 출근 하던 날의 미묘한 감정, 암스테르담 여행이 주는 신선함 같이. 낯선 경험은 뇌에 각인된다. 그 순간들은 분명히 기억난다.


그저 수많은 날들이 비슷하게 사라졌다. 나이 먹는 게 싫다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원치 않으면서 퇴근은 빨리 하고 싶고 주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고, 그런 기분으로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래서 여행이 좋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하는 류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아, 비행기 탈 때만 빼고..) 나는 지난 여행의 순간순간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것은 분명히 반짝였고 밀도 있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낯설게 느끼기로 작정하고 순간순간을 단지 기억이 아니라 추억으로 만들던 시간들이었다.


아부다비 공항 코스타 커피.


가령 2019년 9월에 나는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에티하드 항공을 탔고 아부다비에서 경유를 했다. 첫 책을 퇴고하느라 정신없던 시기였는데 예전에 유럽 여행 항공권을 끊어 놓은 터라 취소할 수가 없어 노트북을 들고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에서도 퇴고를 했고 경유지 공항에서는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낯선 그녀는 이번이 첫 해외여행이어서 너무 떨린다고 했으며 내게 경유해야 하는데 공항에 내려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냐 등등 질문을 했다. 친절하게 들어주고 대답해줬더니 고맙다며 내릴 때 악수를 요청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는데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에서는 자전거가 일상 교통수단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호스텔에 묵었다. 다운타운과 페리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거리에 자전거가 어찌나 많은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암스테르담 인구수보다 자전거가 더 많다고 한다. 땅이 좁고 도로도 좁아 자동차나 버스가 다니기 어렵고 지하철도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가 본 친구 말로는 요새는 전기차도 엄청 많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2030년까지는 모든 휘발유와 디젤차를 금지하고 전기차 100%를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야심 찬 목표가 있다고 한다. 환경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일까? 재밌는 나라다.


거리에서 팔던 암스테르담 기념 마그넷. 자기네 나라의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다. 암스테르담 특유의 건물, 거리를 뒤덮은 플라워 숍, 커피숍, 바이크 숍, 레드 라이트 디스트릭트


암스테르담은 개성이 뚜렷한 도시다. 아름다운 운하의 도시이자, 대마초와 성매매가 합법인 곳이다. 외국인은 착각할 수도 있는데, 암스테르담에서 커피숍(Coffee shop)은 대마초를 파는 곳이다. 그냥 커피만 마시려면 '카페(Cafe)'으로 가야 한다. 카페에는 연초 타입도 있고 대마 사탕류도 있어서 사람들이 기념품으로 사곤 했다. 참고로 대마초가 네덜란드에서는 합법일지라도 한국인이 대마를 하면 불법이니 주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해외의 한국인에 대해 속인주의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숍.


유럽이나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암스테르담은 로망의 도시인데, 안녕 헤이즐 같은 몇몇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운하 때문인 것으로 묘사한 것 같으나.. 사실은 대마초가 합법이기 때문이라는 게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린 결론. 아직까지는 대마가 미국 일부 주, 캐나다, 우루과이, 몰타, 조지아, 태국,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만 합법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여행 중에 '대마초 피다가 떨어지면 암스테르담에 가서 사야지' 같은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많은 유럽 국가에서 대마초가 합법은 아니지만 경범죄나 다름없게 취급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또 놀라웠던 것은 성매매가 합법일 뿐만 아니라, 성매매 업소가 메인 스트릿 1층에 떡하니 자리 잡고 대낮부터 영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업소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강남역 스타벅스 옆 1층에서 대낮부터 영업하는 게 훤히 보이는 구조는 아니지 않은가.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는 숨어 있는 척이라도 하는데 암스테르담은 다르다. '레드 스트리트', 그러니까 홍등가라고 불리는 지역이 도시 최고의 번화가고 유치원과 카페를 양 옆에 두고 1층부터 성매매 업소가 있다. 대낮부터 성매매 여성이 호객 행위하는 게 보인다. (지나가다가 깜짝 놀람..)


홍등가 투어를 가면 이런 가게 같은 것도 있다고 알려준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한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의 신봉자들은 홍등가 투어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단체 투어도 시켜준다. 물론 성매매를 해보도록 관광한다는 게 아니라 홍등가를 그냥 단체로 걸어 다니면서 여기에는 이런 게 있고 이게 허용된 역사적 배경은 어떻고 이런 설명을 해 준 다음에 성인용품 가게도 구경시켜주고 성 박물관에도 데려가 주고 하는 식이다. 투어를 이용 안 해도 홍등가를 여행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냥 번화가다. 여자 혼자 여행하면 혹시 위험할까 해서 투어 예약한 건데 실제로 가보니까 홍등가가 이 나라의 강남대로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도 엄청 많고 카페테라스에서는 애들도 뛰어다니고 유치원도 있고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밤에는 안 가보기는 했는데 여하튼 낮에는 그냥 번화가였다.


홍등가 투어들도 여러 개가 경쟁하기 때문에 각자 차별점이 있는데, 호스텔에서 사귄 친구는 자기는 게이이자 페미니스트인 호스트가 진행하는 홍등가 투어를 어렵게 예약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나는 그냥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한 단체 투어를 다녀왔는데.. 살짝 후회. 그런 특별한 콘셉트의 투어였으면 더 재밌었으려나 생각했다. 그 호스트는 대체 어떤 시각으로 성매매 합법화에 대해서 이야기했을까?


강남 어딘가. 출처: 중앙일보


여하튼 간에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대다수 나라가 성매매가 불법인데 여기는 합법인 데다가 그것도 이렇게 떡하니 존재하다니 신기한 인간 현상이다라고 생각을 하다가.. 꼭 이 나라만 신기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는 성형 수술이 발달해서 성형 관광 상품이 있다지 않나. 중국 같은 곳에서 K팝 스타처럼 성형하고 싶어서 성형 관광을 온다고. 사람 뼈를 깎고 실리콘을 넣는 것도 관광이고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인 압구정은 성형외과로 뒤덮여 있는데 네덜란드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더 이상할지도.


암스테르담에서도 러닝을 했다. 나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항상 러닝을 한다. 깃발을 꽂는 느낌이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럽 여행을 하다가 아랍 에미레이트 연합(UAE)의 수도 아부다비에 경유하러 갔더니 이 나라는 이슬람 국가여서 또 정말 다르단 말이지. 비행기 몇 시간만 타면 대마초까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 술 구하기도 힘든 나라에 갈 수 있는 거다. 이슬람 국가이기에 이 나라 주민들은 술을 구매하려면 주류 면허가 있어야 하고 제한된 곳에서만 술을 마실 수 있다. 관광객들은 면허 없이도 주점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나 기본적으로 주점이 안 보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려면 호텔이나 가야 바가 있다. 뭐 당연히 관광을 왔으면 호텔에 머무를 테니 술 한 잔 하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어딜 가도 술집이 많고 밤이 되면 번화가에서 술 마시며 시간을 즐기는 문화는 경험할 수 없다는 점. 얼마나 세상은 넓고 문화는 다양한가.


UAE의 수도 아부다비의 그랜드 모스크. 만수르가 UAE 왕족이다.


인생에서 며칠을 기억하냐는 주제로 출발해서 이야기가 많이 샜지만, 어쨌든  요지는.. 이렇게 새로운 문화권과의 조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고 경험이 뇌리에 각인된다는 점이다. 한국에 가만히 있었으면 보지 않았을 광경을 보고 하지 않았을 경험하지 않았을 생각을 하면서, 추억도 쌓이고 생각도 깊어지고.  입체적인 내가 되지 않았을까?


아부다비 스타벅스. 아부다비인데 두바이 컵만 잔뜩 팔아서 안 샀는데 머그컵 살걸. 이제 보니 너무 예쁘네.


그러니까 이 글은 사실 유럽 여행을 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2020년부터 2년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인천 공항에 가보지 못한 사람이 다시금 출국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여행이 유익하다며 빌드 업을 하는 글인데.. 마침 천정부지로 상승하던 국제 유가가 조금 하락해서 9월부터는 유류 할증료도 내린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추워지기 전에 출국을 좀 해보고 싶다고, 소망을 담은 글이다. 이제 다시 여행 에세이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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