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어서 다행
이른 새벽잠을 설쳐가며 떠나는 여행은 하기 싫지만 생각 없이 지른 항공권 때문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기상.
그래, 이제 여행의 설렘으로 잠못이루거나 '여행인데, 새벽 기상쯤이야...' 하는 마음보다는 몸 걱정, 컨디션 걱정이 우선이다.
안 그래도 전날 먹은 중국 음식 때문인지 속이 좋지 않은데...
엄마는 먼길(?) 가는 아들을, 새벽 4시에 졸음 가득한 얼굴로 배웅하셨다.
12월 초인데 날이 많이 추웠다.
배낭의 짐을 줄이기 위해 겨울 옷을 최대한 줄이고 현지 날씨에 맞게 입고 가려고 했지만 너무 추웠다.
그래서 두꺼운 패딩과 겨울 바지를 입고 간 다음, 공항에 있는 옷 보관소를 이용할까도 고려했지만
그냥 얇은 내복 하의만 챙겨 입고 가서 공항에서 벗기로 했다.
상의는, 어차피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비 오는 날의 양명산을 염두에 둔 아주 얇은 뭉치면 한 줌 거리의 패딩과 후드, 그리고 방수재킷을 몽땅 껴입고 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다.
차디찬 기온의 겨울 새벽 거리, 이런 여행 아니면 언제 또 맛볼까.
그래도 아직 여행에 대한 설렘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서 우선 키오스크로 항공권을 발급받았다.
여권을 스캔하고 좌석을 선택하고... 좌석은 창가로 지정.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발권을 하니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아있는 좌석중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
'비대면 서비스'가 비인간적이고 정이 없어진다고도 하지만 사람 간의 스트레스는 없애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맥도 중요하다지만 언제부터 내가 그렇게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가.
그냥 현재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있는 곳에서라도 충실해야지.
반면, 몇 번인가 햄버거를 키오스크로 주문하다가 실수로 원치 않는 결재를 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그때그때 다르다.
화장실로 가서 옷가지들을 벗어 배낭에 넣고 가벼운 차림으로 탈피했다.
아직 비행기 타는 게 재미있다.
사람들과 짐으로 가득 찬 거대한 물체가 하늘을 난다는 게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익숙한 곳으로부터 낯설고 먼 곳으로 데려다주니까.
처음처럼 떨리지는 않았지만 긴장 속에 바퀴가 땅으로부터 떨어졌다.
곧 시야가 흐려지며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가 싶더니 햇빛이 눈부셨고 아래로 구름이 깔린다.
마치 구름 한 곳이 뚫려 흘러내려가는 듯 보였다.
저가 항공인 데다 2시간 30분밖에 되지 않는 비행거리라 기내식은 나오지 않았고 물 한잔을 받아 마셨다.
타이완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저수지로 보이는 커다란 웅덩이들이 많았고 '우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숲과 나무 군락들이 이국적이다.
밝은 색 제복의 공항 근무자들에게서 같은 동양인이지만 어딘가 다른 인상이 느껴졌다.
밝은 아이보리색의 제복에서는 아주 옅은 녹색이 묻어 나와 아열대의 기후를 색깔로 보여주는 듯했다.
낯섦이 느껴지니, 다행이었다.
신선했다.
비행기 문을 열고 공항 건물로 연결된 통로에 발을 내딛는 순간의 느낌이 묘했다.
그 느낌을 누리며 천천히 공항으로 들어간다.
인천공항에 비하면 크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잘 관리해서 반질반질 손때가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곳곳에 경비원들이 보였지만 위압적이지 않았고 사랍들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고작 2시간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풍경과 사람들의 옷차림, 대기가 달라졌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도 조금 달랐다.
뚱뚱한 건 아닌데 조금 둥글둥글한, 마른 사람에게서도 그런 느낌이었나...
암튼 뭔가 미세하게 달랐다.
영화로 치면 오프닝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꼭 비정성시를 볼 때의 느낌? 홍콩영화도 아니고 중국 영화도 아닌 그런.
온라인으로 입국신고를 해놓았던 터라 상대적으로 짧은 줄을 섰고 조금 빨리 수속을 끝낼 수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공항 내에 있는 환전소로 향했다.
환전을 하려면 길지는 않지만 줄을 서야 한다.
미리 환전해오길 잘했네.
공항 직원에게 '이지카드'구입처를 물어보니 '한국인인가요?'라고 물어보며 알려준다.
한국사람 많은가 보네.
얼마를 충전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판매원이 400대만 달러를 추천해주었다.
'400대만 달러'하면 상당히 큰 액수 같지만 '400원'이라고 하면 '에게...'
대략 우리 돈에 '곱하기 40'하면 된다지만 아직 화폐가치에 대한 개념이 없다.
1000대만 달러를 주고 400 대만달러가 충전된 이지카드와 500대만 달러를 거슬러 받았다.
100대만 달러는 카드 값으로 반환이 되지 않는다.
우리 교통카드가 4,000원임을 감안하면 비슷한 셈이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가면 되는데,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탈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한다, 내가 못해서 그렇지.
어째 조금 경직되어있던 마음이 풀어졌다.
공항 건물 지하로 내려오니 푸드코트가 있다.
시내에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있을 때 먹자'라는 생각에 그리 넓지 않은 푸드코트를 둘러보았다.
푸드코트엔 익숙지 않은 냄새가 떠돈다.
위층에는 '서브웨이'도 있었고 푸드코트엔 '버거킹'도 있었지만 대만이니 대만 음식을 먹어봐야지.
그런데 대만 버거킹은 어떤 맛일까 궁금하기는 하다.
대략 한 끼에 150대만 달러 안팎, 우리 돈으로 5,000~7,000원가량이다.
맛있어 보이는 오리고기 도시락을 먹고 싶었지만 단체주문이 들어와 40분 기다려달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오리 대신 닭이라고 레몬 치킨라이스를 먹었다.
아마 대만 음식은 아니고 동남아 음식 같았다.
달달한 찜닭과 비슷해서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빈 그릇과 쟁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살펴보았더니
그냥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치우는 사람들이 수거해간다.
왠지 음식을 먹을 때면 도전하는 기분이 든다.
약간의 기대와 약간의 걱정,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
이번 도전은 그럭저럭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