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면 지하철역 앞 연로한 할머니의 좌판을 지나간다. 머리가 다 세 희고, 세월 따라 오그라든 등이 할머니의 연세를 짐작하게 한다. 좌판에 깔린 물건들은 무질서 속에서 나름의 규칙에 따라 진열되어 있다. 한 번씩 무어라도 사려 기웃 거려 봐도 진작에 쓸모 잃은 오래되고 낡은 물건들은 결국 지갑을 열지 못했다. 풀장을 메웠을 고무공들, 손잡이 없는 플라스틱 흔들 말, 이 빠진 그릇, 늘어난 티셔츠. 쓸모를 논하는 것이 쓸모없는 물건들 뿐이었다. 한 때가 지나 이제는 무용하다 말하는 세상을 향해 좌판 위 물건들이 할머니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오다니며 어르신의 식사가 걱정돼 먹을 것을 사드리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때마다 어르신은 봉지에 고무공을 담아 쥐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받는 사람들은 괜찮다며 다시 할머니 손에 봉지를 되주었다. “아니여, 할머니! 많이 파셔!” 문득 궁금했다. 쓸모를 묻기 어려운 물건들을 보자기에 꽁꽁 싸매든 할머니의 연유가.
며칠 전 할머니의 만물 좌판을 지나는데 못 보던 물건이 생겼다. 껌이다. 씹으면 코가 뻥하고 뚫려 시원해지는 녹색 껌을 팔고 계셨다. 여전히 쓸모 잃은 물건들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껌은 좌판의 맨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언 듯 보아도 주력 상품인 듯 보였다. 껌 뒤로 손글씨가 쓰여 있다.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따라 읽었다.
“와, 최고의 카피라이터시네!” 예상치 못한 글귀에 놀라 흠칫했다. 찰나에 읽힌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걷는 내내 마음에 남았다. 점점 먹먹해졌다. 백 보는 더 지나친 길이었지만 되돌아가 지갑을 열었다. 껌 두 개를 집었다. “할머니! 이천 원 맞죠?”
껌을 뜯어 입에 몰아넣고 오물거리며 걸었다. 민트향이 싸하다. 코가 뻥 터진다. 콧길을 따라 서늘해진 가을 공기가 코끝을 알싸하게 잡아 쥔다.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며 잠깐 눈을 감고 드는 숨을 크게 마셨다. 새삼 내가 숨 쉬고 있구나 체감했다. 밤바람이 제법 선선해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를 빙 둘러 걸었다. 턱이 뻐근해질 때까지. 그사이 밤이 꽤 진해졌다. 이십 분 남짓 질겅거리니 단물이 다 빠졌다. 씹던 껌을 종이에 '투'하고 뱉었다.
곱씹어야만 했던 고민들도 이리 오물거리다 '투'하고 뱉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껌껌할 땐 껌을 씹으라는 할머니의 말이 이런 이유에선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글리 @heyg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