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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Nov 21. 2023

닦고 비우면 남게 되는 것들

청소의 기본기


청소의 기본기

닦고 비우면 남게 되는 것들


계절 하나를 보내고 새 계절을 맞으려면 한바탕 먼지를 털어내고 옷장을 비워내야 한다. 오염된 옷은 제때 세탁소에 맡기고, 잠옷으로 몇 번 더 입으려고 보관해 둔 티셔츠도 개수가 넘치면 정리가 필요하다. 먼저 자리를 텅 비우고 물걸레로 두어 번 가만 닦아 준 후 필요한 물건, 옷가지만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비우면 채우기가 훨씬 수월하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나머지는 쓸모에 따라 당근을 하거나, 나눔을 하거나, 버린다. 미련이 남아 선뜻 정리하기 어렵다면 큰 종이가방에 넣어두고 한 달 정도를 두고 본다. 그사이 꺼낼 일이 전혀 없었다면 딱, 거기까지인 거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가진 물건을 파악하고 진짜 취향을 알 수 있다. 잃어버렸던 무엇을 찾기도 하고, 긴가민가 했던 마음에 확신이 서기도 하고, 사고 싶었던 물건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기도 한다.


묵은 먼지를 닦고, 가라앉은 먼지를 다시 닦아내니 해가 다 저물어간다. 몇 해 전만 해도 살림에 들이는 시간을 무척 아까워했다. 왠지 일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차라리 좋아하는 자전거나 캠핑을 떠나는 게 시간을 훨씬 더 생산적으로 잘 쓰는 방법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나는 왜 생산적인 시간에 집중하는가’ 이유는 매우 다양했지만 대체로 바깥에서 발화되었다. 더불어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기 위해, 혹은 생산적인 시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무엇을 위해 나를 수단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이후로 살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머무는 공간을 쾌적하게 유지하는 일은 자신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일이자, 일과 일상의 균형을 잡아가려는 의지의 반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일 조금씩 생활을 정리할 때마다 내 상태와 변화를 인지할 수 있어 나 자신을 스스로 정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닦고 비워 낸 후 남겨진, 혹은 남겨질 무엇. 그 무엇이 모여 내 곁을 이룬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도 절대 소홀할 수 없을 것 같다. 


• 글과 사진 @heyg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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