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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열린 결말

사이의 일들

by 글리

뉴스를 통해 한 분쟁 사례를 접한 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자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 사이 관련 뉴스와 인터뷰,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들의 과거 행보가 드러난 히스토리도 찾아보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A와 B 두 창작자가 하나의 작품을 함께 작업하던 중, 2차 수정 과정 이후 협의하에 프로젝트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B가 작업한 작품이 세상에 공개될 예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 과정에서 해당 창작물이 과거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작업물에 기반한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제작사 측은 미완으로 남았던 공동 작업물을 ‘원작’으로 인정하고, A의 이름을 크레딧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B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완의 작업을 끝까지 완성한 건 자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A 역시 이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A는, 그 작품이 단순히 참고 수준을 넘어 기존 작업물 위에 쌓인 결과물이라면 원작자로서의 표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제작사는 법적 판결 전까지 어느 한쪽의 이름도 크레딧에 올리지 않기로 하고 작품을 공개하는 선택을 했다. 이로써 A, B, 제작사 모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방법이 최선이었을까?
이 지점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이 분쟁을 곱씹게 되는 이유다. 일을 하다 보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일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 기여에 대한 보상 문제는 언제나 갈등의 씨앗이 된다. 가령,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고 1차 기획서를 만들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되었고, 다른 누군가가 이를 발전시켜 끝내 세상에 선보였다고 가정하자. 회사 입장에서는 최초 기획자가 있었음을 인지한 이상 이를 무시하기 어렵다. 특히 구두상의 아이디어가 아닌 문서화된 1차 기획서가 존재한다면 향후 권리 분쟁의 여지가 남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는 절차상 문제없는 방법을 선택하려 할 것이고, 그 선택은 단지 실무적 판단을 넘어 법적 안전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조로울리 없다. 특히 창작물의 경우 그 민감함은 배가된다. 창작의 공은 쉽게 측정되지 않고, 감정은 때때로 사실보다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이 글은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글이 아니다. 나는 단지 이 사례를 통해 내가 어떤 시선을 가진 사람인지, 또 유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스스로 시뮬레이션 해보고 싶었다. A와 B, 그리고 제작사의 입장을 나름대로 이해해보려 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 역시도 간과했을 것을 ‘간과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사람은 본래 억울함 앞에서는 ‘타인의 입장’보다 ‘자신의 입장’에 더 쉽게 매몰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A는 이 창작물이 과거 협업의 연장선에 있다는 정황을 근거로 원작자 표기를 요구했고, B는 구상에 영향은 받았지만 완성도와 스토리는 전혀 다르며 결과물은 오롯이 자신의 창작이기에 A의 표기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제작사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기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A를 원작자로 인정하고자 했다.


나는 이 분쟁이, 누구의 공이 더 크냐를 따지는 과정에서 정작 작품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한 더 중요한 조건들을 놓쳐버렸다고 느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B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의 지난한 노력 없이는 이 작품이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A의 초기가 없었다면 이 결과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공이 과소평가되고 타인이 거저 빛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드는 감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일은 감정이 아니라 절차로 정리되는 영역이다. 이 절차들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장치들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서로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협의를 도출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절차가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놓치는 것은 없는지, 최선인지를 묻기 위함이다.


"왜 저 사람에게 크레딧의 첫자리를 내주어야 하지?"

"원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감정에 치우치면 사안을 바로 보기는 어렵다. B가 원작자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작품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컸기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내가 한 일에 비해 과소평가받는 기분, 내가 가진 뜻이 폄하되는 상황에서 상처를 받는다. 그건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때 서운함과 억울함이 앞서면 내가 기여한 부분만 크게 보이고 그 외의 모든 건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절차를 하나씩 짚어보는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 일이 굴러가는지, 선례는 어떤지, 먼저 겪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는 일. 물론 그 절차들 역시 완벽하진 않다. 허점이 있고, 불합리도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절차를 따르는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기여한 것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으려는 노력, 감정이 아닌 절차를 통해 이성적인 태도를 지키려는 자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어쩌면 그게 진짜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고 스스로 지옥에 빠지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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