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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물이 Jan 21. 2022

11.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리멘탈러

동지들 있나요?




얼마 전 '나물 씨는 어떨 때 스트레스를 받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말하자면 끝이 없는데 말문이 막혀 떠올리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난감했다. 우선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쩜 말을 저렇게 잘할까 싶어 부럽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나는 남의 말 듣는 것이 재미있어 말 많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세상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 각자의 다른 사정으로 다른 방식으로든 스트레스는 받게 되어 있다.  다만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도 감정을 적절히 통제하거나 얼른 잊어버리거나 하는 사람은 자신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나를 적당히 아는 지인들은 나의 성격이 수더분하고 무던한 줄 아는데 친해지면 안다. 음식도 가리고 사람도 가리는 편이라 까탈스럽고 체력도 약하고 소심함에서 오는 예민함에 힘들어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말이다. 얼마 전 집순이 집돌이는 사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영상을 봤는데 영상 속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은 에너지가 낮은 사람일수록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말투 표정까지 모두 의식하고 신경 쓰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체력 소모가 크다는 말이었다. 나는 영상을 보고 딱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심리 상담을 받았을 때 일상생활에서 긴장과 불안이 남들보다 높고 대인관계에 민감한 편이라는 평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는 눕혀놓으면 울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안기지도 않아서 무조건 엄마가 안거나 업고 있어야 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타고날 때부터 까탈스럽게 타고났는데 성인이 된다고 해서 기질이 바뀔 리 없는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잠들기 전 내가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서로 말다툼을 할 때, 내가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을 때나 반대로 상대방이 약속 시간에 늦을 때, 시끄러운 소음 소리가 들릴 때, 예상치 못한 지출이 나갈 때, 업무하다 실수하였을 때, 상사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민원인을 상대할 때 등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러나 속으로 삼킬 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남한테 짜증을 내거나 굳이 티를 내지는 않는다. 혼자 삭이는 편이라 어쩌면 더 예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도 사소하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는데 살고 있는 자취 집 전기 계량기가 건물 관리실에서 따로 모니터링하는 숫자와 맞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관리실에서 사람이 와서 집 안에 있는 계량기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길래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것이 싫었지만 한 번뿐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우리 집 포함 몇몇 세대의 전기 계량기가 고장이 난 것 같다며 계량기를 아예 교체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교체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하며 비용이 대략 20만 원 정도 한다고 하였다. 일단 고장의 원인도 알 수 없는데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선 집주인 아저씨에게 전달할 일이라 판단하여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당연히 월세로 살면 수도, 전기, 난방 관련해서는 집주인에게 청구하는 게 맞으니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는 권리인데 비용에 관련된 내용을 전달하려 하다 보니 내용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간단하게 '전기 계량기가 고장 나서 교체해야 한다는데 관리실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하면 끝인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보내다 보니 문자 내용이 구질구질 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고 문자를 다 쓰고도 보내기까지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망설이다 보냈더랬다. 통화했던 관리실 담당자분께 집주인이 따로 있다고 슬쩍 이야기를 했는데 대신 상황을 전달해줄 의사가 없어 보여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부탁은 잘 들어주지만 부탁을 잘 하진 않는다. 남이 거절하는 건 괜찮지만 내가 거절하는 건 왠지 미안해서 잘 거절하지 못한다. 남에게 돈을 빌려본 적도 물건을 빌려 본 적도 별로 없다. 중학교 때 단짝이었던 아이가 학교에서, 우리 집에서 이것저것 내 것을 잘 빌려가 놓고는 돌려줄 기미가 없어 돌려 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해 몇 달 동안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겨우 용기 내 말을 꺼내긴 했는데 그 말을 하기까지 나는 그 아이가 열심히 수다를 떨 때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속으로는 말을 꺼낼 타이밍만 재고 있었고, 말을 하지 못한 날에는 집에 가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렸는지 모른다.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속으로 지금 말할까? 하고 생각했으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얼마나 소심하면 저러나 신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보니 나도 내가 신기하긴 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을 꺼냈던 그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집 근처 도로에 백년은 넘은 큰 이팝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는데 하교 후 친구들과 나무를 둘러싼 낮은 돌담에 앉아 종종 수다를 떨곤 했다. 친한 친구들과의 아지트 중 한 곳이었고, 그날은 그 아이와 나 단 둘이었다. 나는 속으로 일부러 빌려간 물건 이야기가 나오게 대화를 유도했고, 드디어 '그거 나한테 아직 안 준 것 같은데?' 하며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 맞다! 하고 막 기억 난 척하며 그 아이가 그동안 빌려 갔던 목록을 쭉 나열하여 말했다. 나는 아직도 황당함과 동시에 얜 뭐지? 하는 얼빠진 그 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물건이든 돈이든 남의 걸 빌려 가놓고 갚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사람의 심리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이기도 하고 어쩌다 깜빡할 수도 있지만, 집에 내 것이 아닌 물건이 있는데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그 아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결국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나는 두 번 말 꺼내기는 힘들어 그렇게 내게서 손을 떠난 물건이라 생각하고 다시는 그 아이에게 물건을 빌려 주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 뒤로도 학창 시절에 이런 경험이 몇 번 쌓이다 보니 남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빌려는 주지만 속으로 안 돌려주면 어떡하지?라는 의구심을 지우질 못한다. 그래도 이런 경험 덕에 다행히 남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귀가 얇은 내가 남을 의심하는 성격마저 없었다면 신림역에서 나에게 '저기요 길 좀 물을게요'하는 분들 옆에 서있거나 그분들에게 잡혀 제사를 지내고 온 경험이 있는 내 친구처럼 나도 어느 집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내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집주인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낸 후 답장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 사이 스트레스는 점점 축적되고 있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쿨하게 관리실과 이야기해 볼 테니 비용에 대해선 걱정 말라고 답장을 주셨다. 난 일말의 태클도 없이 문제가 해결된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셨고, 새삼 비용에 대해 걱정 말라는 주인아저씨의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지 알고 있지만 아직 덜 스트레스받는 방법이나 적절하게 해소하는 법에 대해선 적당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한테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사람을 멀리한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하혈까지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퇴사를 결심했다. 오히려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을 핑계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피해버리는 방법을 쓰다 보니 상황을 극단적으로 해결해버리는 것 같다.  그렇게 멀어진 사람도 많고 퇴사한 직장도 몇 군데 있다보니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한게 경력으로 티가 나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은 멀어져도 후회가 없지만 직장은 조금만 더 참을걸 하고 후회는 된다.


그래서 올해의 나의 과제 중 하나는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부딪히는 것, 그리고 스트레스가 느껴질 때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보고 내 감정을 이해하는 것, 마지막으로 적절한 해소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많이 알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 나의 장단점을 쓰라 하면 몇 가지 밖에 생각 나지 않는다. 언제 쯤 되어야 나를 잘 알고 나의 내면을 잘 통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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