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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물이 Feb 09. 2022

12. 이팝나무 꽃피는 동네-1



따뜻할 때 보다 마음이 시릴 때, 낮보다는 세상이 멈춘 듯 한 고요한 밤일 때 특히나 옛 생각이 난다.

오늘은 귀찮아서 보일러를 안 틀었더니 전기장판 위의 이불속 몸은 따뜻한데 방 안의 공기가 차갑다.

그런데 어쩐지 이불 밖의 이 서늘함이 싫지 않아 오늘은 이대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 같다.

이불을 살짝 걷어내니 추위와 따뜻함이 공존하면서 차가운 공기가 발과 얼굴을 스치지만 이 아이러니함에 기분이 좋다.


겨울이란 계절은 시리고 냉정한 만큼 외롭고, 외로움이 고독이 되면 어느새 추억에 젖게 하는 힘이 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교실 한가운데 있던 오래된 난로가 갑자기 생각이 다. 우리반은 난로 몸을 녹이기도 했지만 아침마다 돌아가면서 난로에 구워 먹을 만한 것을 가져와 난로 위에 올려놓거나 난로 불 가까이 대고 굽 거나하며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오시기 전까지 옹기종기 모여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거나 장난치는 그 시간이 재미있어 나는 일부러 일찍 일어나 학교로 가곤 했다. 


재미난 추억을 많이 새겨 두고 온 이 곳은 아빠의 고향이었 던 합천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로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에 우리 가족은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본격적으로 생업에 나섰던 엄마는 몇 년 뒤 외할머니에게서 외할머니와 친분이 있는 스님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작은 암자를 관리해 주는 조건으로 집을 빌려주기로 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요양도 할 겸 잠시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고는 고민 끝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다. 한참 나중에 외할머니에게서 '그때 너그 엄마 거기 안 보냈으면 죽었다. 피골이 상접해서 애가 다 죽어 가는 게 보이는데 안 가려는 거 내가 억지로 보낸기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엄마의 건강이 그렇게까지 나빴던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철없는 나이었으니 그저 이사를 가면 앞으로 엄마가 일을 안 나가도 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 매일 하교 후 집에 가면 빈 집에 동생과 둘이 있지 않아도 되고,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려고 잠을 참지 않아도 되며 엄마가 늘 우리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 그저 좋았다. 당시 나는 엄마의 퇴근 시간이 종종 늦어지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세상모르고 잠이 든 동생을 뒤로하고 현관문 밖에 앉아서 팔을 얼굴에 괴고는 멍하니 별을 보다 땅을 보다 그렇게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삿짐도 별로 없이 조촐하게 트럭에 짐을 실었고, 두어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주변에 논과 밭이 많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사한 집은 암자의 법당 옆에 딸린 작은 크기의 집이었지만 세 식구가 살기에 나쁘지 않았다. 


롭게 둥지를 튼 낯선 곳에서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첫 등교하던 때가 아직도 어제일 처럼 생생하다. 

그 날 아침, 밥을 먹는데 내 밥에서 와그작하는 큰 소리와 함께 밥알에서 돌이 씹혔다. 나는 얼른 밥을 뱉었고, 괜히 엄마한테 투정을 부렸는데 엄마는 분명히 다 골랐는데 이상하다고 하시며 등교 첫 날이니 법당 옆에 크게 세워져 있는 관세음보살상에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하셨지만 돌과 절하는 것과의 상관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던 나는 걸어가며 관세음보살상을 슬쩍 곁눈질로 보고는 동생과 함께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새 집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2km정도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왔고 요금을 내려는데 평소 내가 알고 있던 버스 요금을 넣는 투명한 유리통이 보이지 않아 잠시 당황하다 꼭 휴지통 같이 생긴 작은 흰색 플라스틱 원통이 설마 요금통인가 싶어 동전을 넣었는데 역시나 기사 아저씨가 '그건 쓰레기통이고!라고 말하시고는 요금은 휴지통 옆에 상자에 놔두면 된다고 하셨다. 아저씨가 눈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지폐와 동전을 알아서 놔둘 수 있도록 칸으로 분리해놓은 분홍색 상자가 보였다. 나는 민망함에 휴지통에 넣었던 돈을 다시 꺼내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니 기사 아저씨는 됐으니 들어가라 하셨고 얼른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 앞에 앉아 상황을 다 지켜본 할머니 한 분이 '애들이 도시에서 왔나 보네' 하시던 소리에 가는 내내 얼굴이 새빨개졌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동생과 학교로 가 서로의 담임 선생님을 따라 각자 반으로 흩어졌고 나는 중년의 남자 선생님을 따라 과학실로 갔다. 나는 그날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연보라 체크 셔츠에 베이지색 코르덴 멜빵 바지를 입고 등교했다. 선생님과 함께 과학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에 다니던 학교의 절반 정도 되는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뻣뻣하고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고 생님 말이 드디어 귀에 제대로 들어올 때쯤 수업이 끝났다. 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반 아이들은 당시 내가 담임 선생님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키가 커서 새로 온 선생님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웃었다. 그도 그럴게 어릴 때부터 또래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65였으니 어른처럼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버스를 타면 성인요금으로 거스름돈을 받았던 적도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에게만 어색했던 첫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고맙게도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해주었고 낯가림이 있던 나에게 먼저 친근하게 다가와 주었다. 반 아이들은 대략 스무 명 정도로 남녀 비율도 반반이었다. 마을에는 초등학교, 중학교가 하나씩 있었는데 모두 학년 마다 반이 하나인 작은 학교 였다.

그러니 동네 토박이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16년 동안 매일 볼 수 밖에 없는 사이고 그러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각자의 집에 수저가 몇개인지 가족사는 어떤지 속속들이 알만큼 가까운 사이로 비밀이 없는 듯 보였다. 반에는 나 외에도 전학와 정착한 아이들도 몇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아이들과 함께 할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에게서는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보내던 학교 수업이 끝날 때 쯤 한 여자아이가 가족 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다른 지역에 계신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 없는 아이로 소문 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업이 모두 끝난 후 교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 아이가 다가와 사실 선생님이 나물이는 아빠가 안 계시니 알고 있으라며 내가 등교 하기 전 미리 알려주셨다고 가족관계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 굳이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 아이는 화통하게 그런 건 숨길 것도 아니라며 어떤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쟤는 할머니랑 살고 있는데 뭐'라고 말했고, 가리킨 손길 끝엔 나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밝히고 싶지 않은 가정사가 하루만에 까발려질 줄 몰랐던 나는 다 알면서 테스트라도 하듯 물어본 그 아이가 살짝 미웠지만 오히려 거짓말 안해도 되니 잘 됐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학교 생활에 점점 적응해 나갈 때쯤엔 그 여자 아이를 포함해서 우리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아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항상 먼저 나를 찾아와 집 앞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놀자고 불러냈고, 우리는 아이들 답게 서로 장난을 치거나 게임을 하거나 함께 놀러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원래 낯가림이 많았던 나는 친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었는데, 한 번은 내가 도무지 웃는 걸 보지 못했다며 나를 웃게 하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남자아이들끼리 내기를 했다는 사실을 여자아이들이 살짝 귀띔을 해주었는데 나는 내 표정이 그렇게 무뚝뚝한가 싶었고, 또 한편으론 참 별 내기를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왜 갑자기 남자아이들이 내 앞에서 괜히 까불거리거나 장난치는 것인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딱 남자아이들이 할 법한 이 어이 없는 내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나를 웃기려는 전혀 웃기지 않은 한 남자아이의 처량한 몸부림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야 나물이 이제야 웃는다!'라는 말을 했고, 나는 나를 보며 웃는 이 정 많은 반 아이들에게 어느새 마음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은 아니었는데 아빠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부터 아빠는 부산에 있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아빠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다가 다시 부산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반복하면서 저절로 나와 동생도 함께 이동하다 보니 전학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차피 여기도 오래 있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내 맘 속에 자리잡기 시작 했고 아이들과 정을 쌓으려는 노력 보다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나려는 준비를 마음 한 켠에 늘 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에 터득한 것은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너무 정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어려서는 부모 팔자 따라간다는 말이 있는데 엄마가 나와 동생을 친척집에 맡기기보다 꼭 같이 데리고 다니다 보니 전학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부산과 아빠의 고향집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다 아빠는 고향집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남겨진 우리 세 식구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이제 더이상 전학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이사를 간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어느 중학교를 갈건지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것을 생각하면 상의도 없이 미리 결정하고 우리에게 통보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겨우 친한 친구가 생겼는데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서러움에 펑펑 울었다. 이러한 상황에 내 마음은 아직 예전 살 던 곳에 머물러 있었고, 이사를 와서도 한동안은 친했던 친구와 매일 통화를 하거나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내 마음의 벽이 이 아이들에게 내가 웃지 않는 다는 생각을 들게 했던 것일까. 여하튼 나는 이 웃음 내기 사건 이후로 이곳 아이들과 마을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집 가는 방향이 같은 친구들과 하교 후 그날 있었던 일이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면 30분이 금방 이었고, 봄이면 길가에 핀 산딸기를 따먹도 하고 운 좋게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 얻어타기도 하면서 다시 집까지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노라면 산 너머 노을은 어느새 붉게 지고 있고 멀리서 솔솔 피어오르는 가마솥의 연기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나던 정겨운 동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기억이 많은 동네. 그때의 그리움으로 잠시 시린 공기를 녹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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