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베개 바로 아래에 두고 잔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지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보세요..?"
"고성 화재 때문에 새벽 5시부터 특보 들어갑니다! 서둘러 출근해 주세요! "
"네.. 네? 알겠습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1시 15분이다. 어제 잠들 무렵 강원도 고성에서 난 산불이 봄마다 이 지역서 부는 양간지풍을 타고 심각하게 번진 거였다. 최대한 빨리 보도국에 도착하니 긴장된 공기가 가득하다. 중계차를 현장 어디로 보낼지, 전화 연결을 고성 주민도, 산림청도, 기상청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섭외는 가능한 건지, 아침 뉴스를 준비하는 모두가,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티브이를 켠 시청자들이 가장 완벽한 뉴스를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다.
방송이 30분 남았는데도 완성된 기사는 사내 뉴스 시스템에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다. 뉴스 순서도 미정, 생방송에서 전화 연결을 누굴 하는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줄과 호방한 마음이나마 놓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대로 스튜디오에 들어간다.
이제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뉴스 피디 선배의 목소리에 의지해 뉴스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다음 순서로 화재 지역 주민을 전화로 연결한다고 알려온다.
"다음은 고성군 주민 연결되어 있어요!! 최 00 최 00! "
'(아.. 주민 이름이 최 00 씨구나..)'
"도원리! 도원리!"
'(응? 갑자기 도원리는 또 뭐야? 도원리? 도원미? 연결된 주민이 바뀐 건가?)
확인할 새도 없이 카메라에 바로 내 모습이 잡힌다.
"다음은 화재 현장 근처에 사는 고성군 주민 연결해보겠습니다. 도원민 선생님 나와 계십니까? "
"......................."
"(왜 답이 없지?!! 이게 아닌가? 처음 최 00, 이 사람인 건가? 에라 모르겠다! 다시 물어보자! ) 최 00 선생님 나와계신 건가요?"
"네"
그러니까 피디는 강원도 고성군 도원리에 사는 최 00 주민을 연결해준 건데, 내가 도원리를 사람 이름으로 잘못 알아듣고 "도원미 선생님!" 이라며 애타게 부른 거였다. 이제 다 적응했다 싶은데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이렇게 계속된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경험한 스튜디오 안 세상은 취재 현장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치열했다. 앵커는 작은 한 조각일 뿐, 좋은 아침 뉴스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잠든 시간에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모든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인사야 늘 있는 것이고, 토요일 뉴스투데이를 진행한 것도 이제 예상했던 3개월을 넘겨 벌써 1년을 훌쩍 넘어섰으니, 이제 조만간 이 자리를 떠나 본연의 임무, 취재기자에 집중하게 될 거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앵커로서, '아침 뉴스를 준비하는 스텝들의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지 않으려면 나도 잘해야 한다는, 빨간 불이 들어온 카메라 앞에서의 그 무거운 책임감이, 이 자리를 떠나도 오래오래 생각날 것 같다.
이 글은 '아니 77 사이즈 앵커는 없는 거야?! 맞는 옷이 없다니!!'라는 황당함에 쓰기 시작했다. 처음 앵커 미션을 받고 코디님을 만나서 옷을 입어봤는데 나 같은 77 사이즈 앵커가 없다 보니 맞는 옷이 없었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이르면서 부조리한 세상 어쩌고 저쩌고 툴툴거렸더니, 너무 웃기다며 기록으로 남기라고 계속 날 괴롭혀서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바빠 죽겠다며 글은 언제 써??!"라고 물으신다면, 정답은 '토요일 아침 뉴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이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났으니 원래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지만, 그냥 잠을 자는 대신 글을 썼다. 물론 이미 얼마 남은 것 같지도 않은 수명을 더 갉아먹는 것 같은 기분이야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을 것 같았고, 여러 의무감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내 의지대로 뭔가는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위안도 됐다. 특히 가끔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유했을 때 폭발적인 워킹맘들의 반응을 보며, '아, 나만 이렇게 고단하게 사는 건 아니구나' 따뜻한 연대의 마음도 들었다.
처음 내가 뉴스 진행을 시작할 땐 지상파 방송국에 갑자기 40대 나이에 77 사이즈로 갑자기 앵커가 된 여자 기자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다른 40대 여성 앵커의 등장을 막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사고 치지 말자!'라는 부담감이 컸다. 그런데 지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비록 77 사이즈는 아니신 걸로 추정되지만 40대인 여자 기자 선배들이 잇따라 메인 앵커를 맡게 됐다. 이 분들의 멋진 모습에 가슴이 뛰고, 이제 이런 발탁이 이례적인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커다란 변화의 한 시작점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에 '여자 앵커와 남자 앵커 자리를 바꾸자!' 했던 나의 요구가 주춧돌은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쯤은 됐기를 희망해 본다.
감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 바닥을 써 내려가다가 '독자들은 하나도 관심 없다'는 편집자의 저지에 눈물을 머금고 지웠다. 그래도 두 어머니 이상민 님, 이원희 님에 대한 감사 인사는 꼭 드려야겠다. 내가 기자도, 앵커도, 엄마도, 큰 사고 없이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들 도움 덕분이다. 여전히 어머니들의 희생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게 감사하면서도 너무나 죄스럽다. 모든 글을 가장 처음 읽으면서도 늘 평가는 '좋은데' 한 마디였던 나의 멋진 K, 이 기록을 남기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채근하고 격려했던 이 변호사와 양 부사장을 비롯한 멋진 언니들, 표류하는 원고를 끝까지 온몸으로 안아준 한라, 사전 동의도 없이 익명으로 책에 출연한 수많은 M본부 동료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세상은 거칠지만 그래도 당신 덕분에 살 만합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모아, 여기에 몇 가지 이야기들을 더해서 곧 책이 나옵니다.
제 정체성은 '77 사이즈 아줌마'에 다 들어가 있는데, '진짜 77 사이즈 논란'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책 제목은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로 결정되었습니다. 기자의 큰 장점이 구경꾼으로 온갖 재밌는 현장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인데, 제 이름을 내세우는 데다, 게다가 책 표지에 사진까지 넣는다니!! 악!!! 주변에서 한동안 재밌는 놀림 대상이 될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 걱정이 태산입니다.
출판을 앞두고 그동안 올렸던 글들은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부족한 글에 보내주신 응원과 격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