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밸런타인데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을 기준으로, 84일 후면 M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M을 본 건 396일 전이다. 지금까지 연인으로 보낸 771일 중 우리가 함께 보낸 건 100일 남짓 되는 시간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한국에서, M은 독일에서 보내왔다. 그 긴 시간을 우리는 페이스타임과 카카오톡으로 버텨왔다.
2년 넘게 연애를 했지만 우리가 ‘함께’ 보낸 특별한 날은 많지 않다. 특별한 날이라 하면, 연인들이 좀 더 비싼 선물을 하거나 로맨틱해질 구실이 되는 날들 말이다. 2019년 밸런타인데이, 2019년 M의 생일, 2019년 크리스마스와 내 생일, 우리의 첫 기념일이자 새해 첫날이었던 2020년 1월 1일. 다섯 번뿐이었다니, 나도 지금서야 깨달았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저 다섯 번 중 한 번쯤은 더 열정적이고 다정하고 로맨틱한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우리의 첫 밸런타인은 꽤 로맨틱했다. 그때 나는 2월 말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쿨하게 휴가를 써버린 M은 내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동네 꽃집에 달려가 예약해둔 꽃다발을 픽업해왔다. 마냥 빨간 장미 꽃다발은 워낙 흔하니 시시할 것 같았다며 건넨 꽃다발엔 여러 채도의 분홍색 꽃이 가득했다. 연분홍색, 다홍색의 장미와 분홍색 튤립, 분홍색 안개꽃과 소국.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꽃다발과 선물을 주고받은 우리는 집 근처의 귀엽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강가를 산책했다. M의 꽃다발이 조금 특별하긴 했다. 거리에 꽃을 든 사람들은 많았지만 빨간 장미가 메인이 아닌 꽃다발은 보지 못했으니.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꽃은 예쁘고 너흰 참 귀엽다!'며 한마디를 하고 가셨다.
집에 돌아와 꽃을 유리병에 꽂아두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북적거리는 시티 센터의 레스토랑은 싫은데 그렇다고 밸런타인데이에 집에서 먹기도 싫으니 알아서 찾아보라고 했더니 M이 나를 데려간 곳은 청사초롱이 입구에 놓인 한식당이었다. 미술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식당이었는데, 한복을 차려입은 한국인 사장님과 독일인 화가 남편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데이트로 한식당이라니? 왜?라고 묻는 나에게 그는 꽤 사려 깊은 답을 내놓았다.
-1년 동안 타국 생활을 하면서 네가 가장 그리워했을 음식을 같이 먹고 싶었어. 아무래도 진짜 ‘집밥’이 그리웠을 텐데, 아무 한식당이나 가긴 좀 그렇고. 근데 이곳에선 주인분이 매주 직접 구매한 식재료에 맞춰 메뉴를 바꿔서 운영하신대.
처음엔 남편 분이 서빙을 하셨는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눈치채시고는 사장님이 직접 서빙을 해주셨다. 애피타이저로는 파전과 무생채가 나왔다. 김치와 애호박, 계란말이, 감자조림이 나오고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케첩과 다진 야채를 밥과 함께 볶아 얇게 부친 계란 지단을 올린 오므라이스.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딱 그런 모양으로. 반가운 맛으로 채워진 식사였다. 디저트로는 매실차와 작은 접시에 담긴 바나나, 키위, 포도를 가져다주셨다. 사장님은 몇 번이나 ‘먹고 싶은 한식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줘요. 재료를 구할 수 있으면 만들어줄게요.’라고 얘기하셨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다정한 사장님과의 대화 덕에 그날 저녁 식사는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우리는 호떡을 만들기로 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준비해놓고 호기롭게 ‘기다려봐!’를 외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씻었다. 알고 보니 나는 호떡 만들기에 재능이 없었다. 나는 내가 당연히 할 줄 알겠지, 싶었는데 생전 처음 호떡을 만들어보는 M의 실력이 훨씬 나았다. 내 손에선 떨어지지 않는 반죽이 M의 손에선 뚝뚝 잘만 떨어져 나갔다. 결국엔 그가 혼자 만든 호떡을 먹으며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나는 M에게 고맙다고 했다. 연인이 되기로 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맞이한 밸런타인데이를 위해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준비한 그 마음에게. 물론 호화롭거나 영화 같은 데이트는 아니었다(요즘은 그런 게 로맨틱함, 낭만적인 데이트의 기준 같을 때가 있다). 로맨틱 무비의 프로포즈 장면이나 드라마틱한 재회, 반짝이는 선물과 몸통만한 꽃다발.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이 있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나도 M도 그런 걸 원하지는 않는 사람이어서 우리 방식도 충분히 완벽하고 로맨틱했다. M이 날마다 혼자 침대에 누워 내가 어떤 사람일지, 내가 가진 그리움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는 바로 그런 방식 말이다.
M은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이다. 내가 읽고(갖고) 싶다고 하면 잊지 않고 무거운 양장본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한국에 오는 식. 내가 만나자마자 헤어진다는 생각에 슬퍼하다 잠든 사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놓는 식. 이어폰 정전기 때문에 러닝머신에서 넘어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에어팟을 선물해주는 식. 처음 독일어로 내게 읽어준 동화가 헨젤과 그레텔이었다고, 기념일 선물로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이름의 와인을 사 오는 식. 내가 좋아하는 맥주와 음료를 ‘완벽한 여름을 위해 미리 준비해둘 것’ 리스트에 적어두는 식. 나는 이런 그의 로맨틱한 방식이 좋다.
우리의 세 번째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온다. 작년엔 그나마 항공우편 발송이 가능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막혀서 카드 한 장 보내지 못했다. 서로에게 보내지 못한 애정은 잘 보관해두었다가 여름에 몰아서 나누기로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함께 있었다면 초콜릿 한 판을 나눠 먹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생각하니 한동안 주변에서 보고 들을 이야기 생각에 벌써부터 부러움이 끓어오르긴 한다. 동시에 M이 이번에 보여줄 그만의 로맨틱한 장면들이 더 기대되기도 하고. 생각난 김에 오늘 밤은 애인이 지인에게 부탁해 만든 수제 카드나 다시 읽으며 그리움과 부러움과 아쉬움을 다 달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