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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ice Feb 24. 2021

호텔에서 읽은 책, 호텔에서 나눈 대화


  혼자가 마음 편하다. 유럽 국가로 교환학생을 가면 으레 친구들과 스페인으로 영국으로 프랑스로 네덜란드로 여행을 간다던데, 나는 온갖 핑계를 대가며 그 여행을 혼자 다녔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장점이 많다. 내 멋대로 일정을 짜거나 바꿔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여행지까지 와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잤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혼자 있으니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도 경험해볼 수 있고, 마트에서 사 온 과일이나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며 돈을 아껴도 된다. 서로 더 나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관광지 앞에서 수십 번 셔터를 누를 일도 물론 없고, 맛집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숙소의 자유. 나는 싸게 예약한 호스텔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맥주나 와인을 한 잔 마시고 마치 10년 지기 친구를 만난 마냥 떠들다 자러 가는 게 좋다. 사실 그들은 다음날 공용공간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지면 다시 남이 되는 기이한 친구들이지만. 동행이 있다면 그와 함께 하는 상황이나 그의 성향에 따라 그런 기이한 친구를 사귈 기회가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싼 게 비지떡이다. 돈이 없던 시절,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 선택지는 호스텔뿐이었다. 싸다고 예약한 호스텔은 대부분 낡고 지저분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았고, 시끄럽고 번잡한 공용 시설에 있는 물건은 죄다 찝찝했다. 호스텔 후기나 블로그 글에서나 읽은 얘기지만, 나 역시도 운이 나빴다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될 수도 있었다. 더 운이 나빴다면 그날 밤 만난 상대를 호스텔에(굳이?) 데려와 자는 룸메이트를 만날 수도 있었고. 그런 여행이 지겨워졌을 때, 큰 맘먹고 호텔을 예약했다. 원래 호텔은 선택지에 넣고 고려할 대상도 아니었지만 사치를 부린 거다. 그 와중에도 그나마 싼 편에 속하는 비즈니스호텔을 예약했다. 그럼에도 두껍고 무겁고 바삭한 하얀 이불과 베개, 큰 욕조, 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풍경 정도는 허용됐다. 문 옆의 Do not disturb 버튼을 눌러놓고, 키가 작은 나에겐 이불이나 다름없는 큰 가운을 두르고 크고 넉넉한 크기의 침대에 눕자 평온함이 나를 에워쌌다. 어떤 우울도 외로움도 다가오지 못했다. 낯선 나라, 그곳에서도 더 낯선 도시의 호텔에 누운 나에게 고민이라고는 ‘이따 어떤 맥주를 먼저 마실까? 맥주 마실 때 넷플릭스에서 뭘 보면 좋을까? 내일은 어디 가서 뭘 볼까?’ 정도면 충분했다.

  특별한 서비스나 호화로운 무언가를 바라고 가는 것도 아닌데, 혼자 호텔에 가는 일은 즐겁다. 문을 잠그고 앉아 책을 읽고, 그러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밖에서 테이크아웃 해온 음식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을 풀고 나와서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마시고, 그러다 가족이나 친구와 잠깐 통화를 하고 가운을 입은 채로 잘못 덮으면 질식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드는 하루. 이 모든 일을 혼자 하며 나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호텔에서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것) 외의 모든 것이 부재하는 걸 느끼는 게 좋다.


  지난 주말은 퇴사 전 마지막 휴가였고, 코로나 때문에 멀리 여행을 가고 싶진 않아서 서울에 있는 한 호텔을 예약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붐비던 거리는 한산했다. 12시에 체크인 해 그다음 날 6시에 체크아웃할 수 있는 객실을 예약한 터라, 일찌감치 도착한 나는 객실 창가 소파에 앉아 아껴두었던 책을 꺼냈다. 플레이타임에서 번역 출간한 오브젝트 레슨스 1권인 『호텔』이었다. 이 책에서 조애나 월시는 프로이트의 「도라의 히스테리 분석」과 캐서린 맨스필드의 『독일 하숙에서』, 영화 <그랜드 호텔> 등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호텔/집을 해석했다. 초반이 꽤 복잡한 이야기였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겼다. 혼자 호텔에 가는 날을 위해 아껴둔 보람이 있는 책이었다.

  조애나 월시는 『호텔』에서 ‘집일’에 대해 말한다. ‘집일’은 이런 거다. 매일같이 해야 하는 침대 정돈, 청소, 다림질, 빨래 같은 것. 호텔에는 이런 일이 없다. 설거지도 없고 신발 정리도 없다. 개지 않은 수건과 양말이 소파에 쌓여있지도 않다. 오히려 내가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어두고 아침을 먹으러 나갈 수 있는 곳이다. 돌아오면 옷장 안에 내 짐가방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마치 나 역시도 그곳에 부재했던 것처럼. 호텔에는 ‘집일’이 없다. 독일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그 점이 너무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지하에 내려가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방으로 돌아와 바닥을 청소하고 자는 동안 침대에 흘려놓은 머리카락을 떼어내고 1인분의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꺼내와 널고 빨래를 개고 옷장에 정리해두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싱크대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나 한 명만 사는 그 작은 방을 집처럼 만들어놓기 위해 너무 많은 ‘집일’이 필요했다. 호텔에 도착한 이상,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 한국에 돌아오니 집은 다섯 명이 사는 공간이었고, 그러다 보니 ‘집일’의 규모도 마찬가지로 커졌다. 게다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카페에서 남들이 먹을 빵이나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음료를 제조한 뒤 남들이 먹은 접시와 컵을 설거지하고 남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남들이 지저분하게 사용한 테이블이나 바닥을 쓸고 닦는 일이다. 진짜 ‘집일’과 ‘집일’과 비슷한 일들에 둘러싸인 일상에서 겨우 벗어나 읽게 된 조애나 월시의 이야기는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호텔에서 혼자 읽고 싶어 몇 년을 아껴둔 책. 배경으로 넷플릭스 <도시인처럼>을 틀어두고 『호텔』을 읽으며 혼자 커피 두 잔을 마셨고 빵도 먹었다.

  호텔의 공간들을 분석하는 5장 「호텔 일기」를 읽다 보니 밤이 되었고 M과 통화할 시간이었다. 그는 객실이 좋아 보인다며, 잘 쉬었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보다 방이 크고 욕실이 좁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창밖으로 보이는 조계사와 서울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집에 있지 않으니 (실제로 행동에 옮기냐 아니냐를 떠나서)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거나 빨래를 해야 한다거나 밥을 차려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좋다고 했다. M은 내가 편하게 쉬었다니 좋다고 말했다. 네가 곁에 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하자 M이 말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렇게 혼자 쉬는 건 중요한 일이야. 우리가 같이 생활하게 된다면 한 번씩 그런 날이 필요해질 거야. 서로가 없이 원하는 취미 생활을 즐기러 가거나 진짜 혼자만의 휴가를 보내는 날. 서로가 너무 싫고 지겹고 따분해서가 아니라, 우린 둘 다 혼자에 익숙한 사람들이니 혼자인 지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지금처럼 하는 거야.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그걸 찾아가서 쉬고 돌아오는 거지. 난 분명 그 휴식 끝에 너에게로 돌아갈 거고, 너도 나에게로 돌아올 거라고 믿어.


  M이 장난처럼 결혼이나 동거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10년쯤 뒤에나 다시 얘기하자며 뒷걸음질치곤 했다.

  사실 연애 초기의 나는 장거리 연애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이 충분히 보장된다는 부분 때문에 장거리 연애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이런 혼자만의 시간 그만 좀 갖고 싶다) 독일을 떠나기 전날 밤, 너무 슬프다며 우는 연인을 보며 당황하는 쪽은 나였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들뜨기도 했던 마음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나에겐 혼자인 시간도 그만큼 소중했다. 호텔로 휴가를 떠나는 그날만 해도 지하철에 앉아 ‘우리가 함께 살게 되면 이런 자유는 어렵겠지. M은 나보다 더 친구가 없으니까 내가 혼자 친구들을 만나서 놀면 외롭다고 생각할 텐데. 이제 내 독일 친구들은 다 다른 도시에 흩어져있는데, 그 애들을 만나러 며칠 집을 비운다거나 하는 게 가능할까?’ 같은 생각을 했었다. M은 쉽게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준 것이다.


  나는 집이라는 공간이 싫을 때가 있다고 M에게 여러 번 말했다. 집에서 해야 하는, 소소하지만 조금만 미뤄도 금방 티가 나버리는 일들이 너무 싫다고. M은 ‘너 혼자 하지 않을 일’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음식을 하면 다른 사람은 옆에서 정리를 돕고 설거지를 하고, 일찍 일어난 사람이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 놓으면 늦게 일어난 사람은 빨래를 너는 식이면 된다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M에게도 집은 집일 것이다. 언젠간 우리 둘 다 일이 있는 ‘집’이 지겨워지는 날이 올 테지. 그렇다면 우리는(나는) 호텔로 떠날 것이다. 충분한 휴식 후엔 집으로(M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들 휴가 끝엔, 체크아웃 후엔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자신이 꾸리고 돌본 것들이 있는 익숙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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