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지만
지난 한 해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인천공항 카페에서 따뜻한 바닐라 라테를 마실 때만 해도 기약 없이 M을 보지 못한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그때만 해도 복작거리던 공항 카페에 앉아 우리는 ‘너는 여름에 또 올 테고 나는 가을에 갈 테니까’, 그런 희망으로 서로의 아쉬운 마음을 위로했다. 바로 몇 달 뒤의 미래가 이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몇 번을 절망하고 울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자 친구를 일 년 넘게 못 봤다고요? 어떡해, 너무 보고 싶겠다.’라며 안타까워한다. 다음날이면 그들은 인스타에 어느 힙한 카페나 한강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스크 없이 찍은 그들의 사진을 볼 때면 화가 났다. 그들이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니고, 그들이 바이러스를 옮기고 다닌 게 아닌데도 그랬다. 결국 인스타그램에서 (친하지 않았던) 누군가 언팔로우하기도 했다. 그는 매일 한강에서 보드를 탔고, 수도권 거리두기가 막 2.5단계로 상향 조정되었을 때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갔다. ‘무서웠지만 그걸 이겨내고 도전한 멋진 나’에만 도취한 그의 모습에 화가 났다. 당신처럼 ‘이 정도는 괜찮아, 야외활동은 괜찮아.’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거고 그래서 나는 내 연인을 만날 기회를 빼앗긴 거야.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나의 이성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패러글라이딩 액티비티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도 먹고살아야 한다. 록다운도 아닌데 사람이 집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 어쨌든 한국은 정부와 시민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에 비해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거니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들이 나의 연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지금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뿐, 내 생각은 대단한 정의가 아니다. 누가 나보고 국제 연애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왜 이 우울의 책임을 행복한 사람들에게 묻는가... 그런 생각들. 하지만 사랑을 어떻게 이성으로만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자주 나를 괴상한 감정과 우울과 분노로 이끌었다. 코로나 블루보다, 코로나 레드가 나를 강하게 휘감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무책임하게 대면 예배나 집회를 강행한 종교 단체와 집단들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면 전 세계인들이 앞으로 최소한 일 년은 전기세 걱정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흑인들의 죽음 앞에 목소리를 낼 수는 있는 사람들이 팬데믹 시작부터 두드러진 미국, 유럽 내 아시안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행과 차별 앞에는 침묵하는 것에도 화가 나 있었다.* 또, 바이러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휴양지로 떠나고 마스크도 없이 파티를 여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나 있었다. 괴로운 마음으로 출근해, 전자출입 명부 작성을 요구했다가 “씨발년”이라거나 “또라이 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눈물이 났고, 재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될 때마다 줄어든 영업시간만큼 줄어든 월급 때문에 화가 났다. 지난여름, 코로나 시대의 장거리 국제 연애에 대해 쓴 글에 ‘비행기 표 끊을 수 있는데? 설마 애인이 마음이 떠나서...?’라는 식의 댓글이 달렸을 땐 불쾌한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쏘아붙였다. 글을 읽었다면 이런 식의 댓글을 달지 못했을 거고 읽지 않았다면 농담으로라도 이런 댓글 달지 말라고. 작년 크리스마스엔 발목 인대가 끊어졌는데, 응급실에 가는 게 무서워서 다음날에야 병원에 갔다. 병원에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와서는 뭔가를 먹고 마시는 노인들을 보고 놀라 다 낫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치료를 급하게 끝내버렸다. (내 발목은 아직도 아프다) 정말이지 화를 참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런 와중에 무슨 위로가 도움이 되겠는가. 치료약이 나왔다는 말도, 며칠 만에 확진자 수가 어디까지 감소했다는 말도, 백신이 나왔다는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확진자 수가 급증할 때면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린 사람들(꼭 내 지인이 아니더라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은 관광이 아니다’라며 외국 국적의 파트너 입국을 허용한다는 독일 정부의 결정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덕에 곧 독일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줄어들지 않는 독일 내 확진자 수 때문에 나는 M의 집에만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집 둘째는 유치원 교사, 막내는 대학생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조심해야만 한다. 그러니 자국민의 건강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나라에 가는 게 마냥 신나고 설레진 않는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진다 한들, 누가 어떤 위로를 건넨다 한들 이 팬데믹을 끝낼 수 없고 나와 M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줄 수 없다.
나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건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우울하고 무기력한 한 해를 보냈고, 그걸 해소하는 방식이 달랐으니 내가 좀 슬펐다고 누굴 붙잡고 따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내 사랑은 타인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 인생이 괴롭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도 방구석 신세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나라고 대단한 자가격리와 거리두기를 했던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아졌을 때는 친구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 장면을 매 순간, 일일이 인스타그램에 올리긴 어려웠다. 원래도 내향적이지만 독일 내 코로나 확산이 시작된 후로 그나마 만나던 친구들도 일 년 가까이 만나지 않고 있는 M에게 미안해서. 혹시라도 내가 어딘가에서 올린 카페나 식당 사진이 충실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음먹은 사람을 자극할까 봐. 집 밖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고 싶은 날에는 우선 그 충동을 눌러두고 며칠 뒤에 올리곤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50일 뒤면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온다. 50일 뒤면 나는 독일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고, M은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마저도 나에겐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내 사랑이 너무 급해서 팬데믹 상황에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는 유럽 국가로 간다는 게 두렵다. 백신을 맞기 싫다던 M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뵙는 게 두렵다. 애인 없이 산책을 나갔다가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욕을 듣거나 폭행을 당할까 봐 두렵다. 그와 보낼 행복한 시간에 대한 기대감만큼 불안감도 크다. 이 기분을 이해하는 애인의 다정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길을 잃은 나의 괴상한 분노일 뿐.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다.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팬데믹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싶다면 마스크 없이 찍은 사진은 업로드하지 않는 게 어떨까.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는 걸 자제하는 게 어떨까. 당신이 확진자 수가 많은 수도권에 살고 있다면 그나마 확진자 수가 적은 곳에 사는 시민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여행을 자제하는 게 어떨까. 당신이 이 상황에서 비롯된 고통을 호소하는 이에게 진정으로 공감한다면 말이다. 당신이 누리는 자유는, 이런 시기에 더 귀하고 소중하지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허용되진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라는 질병보다, 거리두기와 국경 폐쇄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겐 ‘어머, 어떡해. 힘들겠다.’라는 말을 한 당신이 올린 붐비는 백화점 사진 한 장을 보는 것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당신이 올리지 않은 백화점 사진이 더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이 괴로운 팬데믹을 나 혼자 건너고 있지 않다는 기분이.**
*: 물론 이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 나라는 개인의 연애가 모두의 인권에 우선하지 않는다. 또, 미국 내 BLM 시위의 가장 큰 계기였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곁에서 이를 방관했던 경찰 중 한 명은 아시안이었다. 차별은 한 겹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시안이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친구들이 걱정되어 아시안 커뮤니티를 향한 차별과 폭력에 더 민감했을 뿐이다. 흑인 커뮤니티에서 아시안 커뮤니티를 향한 혐오범죄가 발생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아시안 커뮤니티를 향해 보여준 연대와 관심이 백인 커뮤니티에서 보인 것보다 크다면 컸지, 결코 작진 않았다. 그러니 한국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있는 한국인인 내가 미국 내 인종차별에 대해서 말을 얹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성이 아무리 내게 자격이 없다고 외쳐도, 나의 괴로운 마음은 또 별개의 것이라 사라지지 않았을 뿐이다.
**: 오해는 없길 바란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즐겼으면 한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당신이 누리는 자유가 없다는 걸 가끔은 떠올려주길 바란다. 단순히 국제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나와 M을 비롯한 사람들 뿐 아니라, 의료진이나 이 상황을 전담하는 정부 관계자들, 아이와 노인을 돌보는 노동자 등의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