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을 좋아하는 딸들을 위한 여행
그 날 쿠킹 클래스 예약을 하신 손님들 중 한 분은, 내게 미리 알려 주시고 확인하신 내용이 있었다.
두 딸 중 큰 딸이 보행 장애가 있어서 휠체어에 태우고 가는데
우리가 만나기로 한 지하철 역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만나서 내 차로 이동하는데 접이식 휠체어를 트렁크에 넣을 수 있을지,
쿠킹 클래스 과정을 휠체어에 탄 딸이 옆에서 볼 수 있는지 등등.
그때 모두 가능하다는 점을 알려 드리면서, 노파심에 덧붙이길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이외에 장애인용 리프트라는 것도 있는데 위험할 수 있으니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었다. 안그래도 사고가끊이지 않는데 처음 이용하는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걱정이돼서 한 얘기였다. 당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시간이 되니 다른 손님들은 다 오셨는데 그 가족만 휴대폰 연락도 안되고 10분, 20분, 시간이 계속 지체됐다. 보통의 경우 15분 이상 늦는 손님이 계시면 그 분께는 따로 오실 수 있도록 연락 드린 후 다른 손님들과 함께 먼저 출발하지만, 그 날은 그 분들이 휠체어를 가지고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데다 연락이 안되니 그냥 먼저 갈 수가 없어 다른 손님들께 그 사실을 알려드리고 양해를 구하니 모두 흔쾌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하셨다.
마침내, 30분 만에 너무나 지친 모습으로 엄마와 두 딸이 오셨는데, 늦어서 모두에게 너무 미안하다 하시며 사당역에서 환승하는데만 30분이 걸렸다고 하셨다. 이유는 보통의 환승 방향으로 가면 휠체어로 이동이 안되고, 가까이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환승이 안돼서, 환승을 위해서 역 안에서 30분간 헤맸다고. 리프트를 이용하지 말라는 얘기는 괜히 해서 이 분들이 이렇게 고생을 하셨나 싶어 잠시 복잡한 마음도 들었지만, 얼마 전 서울 지하철 교통 약자의 환승 안내 지도를 휠체어를 타는 아이를 위해 엄마가 직접 만들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휠체어로 지하철 환승은 한국인들에게도 어려워서 본인들이 직접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심지어 이 분들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이다. 얼마나 당황했을지.
쿠킹 클래스가 시작되고 먼저 해물전을 만들기로 해서 각자 파, 당근, 양파를 얇게 채썰기 시작했다. 칼질이 보통 솜씨가 아니어서 평소에 요리를 자주 하는지 물었더니, 이 분들은 텍사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오셨는데 집 앞 밭에서 채소도 기르고 당연히 매일 요리를 한다며 심지어 소,말과 닭들도 키운다고 하시며 핸드폰으로 집앞 사진을 보여주신다.
게다가 그 멀리서 여기까지 여행 온 이유는 특히 둘째 딸이 K-pop을 너무나 좋아해서란다. 이 얘기를 듣다보니 Pentatonix를 엄청 좋아하는데도 심지어 내한 콘서트에도 못가본 내 딸한테 미안하네 라고 웃으며 얘기했더니, 반가와하며 본인들도 Pentatonix 팬이라서 작년에도 몇 시간 떨어진 휴스턴에서 했던 콘서트에도 다녀왔단다. 부러우면 지는거라는 말 맞는거 같다. ^^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0대 둘째와 뇌성마비 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팍팍할까 싶은 마음이 컸는데, 이 사진을 보고 K-pop과 Pentatonix 얘기를 듣고 나니, 또 달리 보였다. 그 둘째 딸은 인터넷으로 한국어도 공부해서 한글 읽기는 물론이고 듣고 말하기도 꽤 많이 이해를 하는데다, 한국의 문화, 역사 등등도 공부한단다. 아주 시골이라고 했는데 그걸 어디서 배우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그 엄마가 본인 아이들은 홈스쿨링을 하고 있단다. 홈스쿨링? 정말? 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잠시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알아보면 볼 수록 부모가 감당해야할 부담에 도저히 자신없어 마음을 접었었다. K-pop에서 시작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영역을 넓혀가며 탐색하고 자기주도성도 길러지는 측면이 있어 좋지만, 엄마가 할 일이 엄청 많은 건 사실이라는 얘기도 하셨다. 무거운 휠체어를 끌고 먼 나라로 여행을 오고, 홈스쿨링을 하고, 집에서 소, 말, 닭을 키우고, 모두 너무 좋은 일이지만 엄청난 부모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그걸 다 감당하는 그 엄마를 보니, 내가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일들이 갑자기 작아져버렸다.
손님들이 돌아가신 후 그날 저녁, 서울 지하철 이용 관련 교통 약자를 위한 안내가 실제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찾아봤더니, 최근 몇몇 역에는 필요한 안내가 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역에서는 달라진게 없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들도 있고, 어떤 역에서는 환승하는데 40분이 걸리기도 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것도 휠체어를 타고 환승할 때 가야할 방향 등을 잘 알고 있어서 헤매지 않고 바로 이동해도 40분일 것이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4/11/0200000000AKR20180411129200797.HTML?input=1195m)
교통 약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뿐만 아니라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부모, 노인 등 생각보다 많다. 아니 그 대상이 아주 소수라고 해도 이동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누군가가 생기면 안되는거 아닌가?
지하철에서 교통 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엘리베이터도 확충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건 현재 엘리베이터로 환승하는 방법이라도 별도로 안내하는 것이다.
위 일본의 경우처럼, 환승을 위해서는 왼쪽으로 가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환승해야 하는 경우에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면, 이렇게 별도의 안내를 하는게 필요하다. 교통 약자를 위한 앱을 만들거나 웹사이트를 만들게 아니라, 현장에서 보고 바로 이동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나? 오죽 답답했으면 한 민간 협동조합이 직접 지하철 역들에 교통 약자를 위한 환승 안내문을 붙이려고까지 했을까? (http://news.joins.com/article/21849463)
어쨌거나 텍사스의 그 가족은 서울에서 버스는 엄두도 못내고 지하철로 힘들게 여행을 마무리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느날 문자로 Pentatonix의 새 앨범이 나온거 알고 있냐면서 신곡 뮤직비디오 링크를 보내주시더니 우편으로 그 앨범을 직접 보내주셨다. 덕분에 우리 딸은 핸드폰으로만 듣던 Pentatonix 음악 앨범을 갖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이 가족으로부터 일본에 갈 일이 있어서 가는 김에 한국에도 며칠 다시 들를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봄 꽃이 이쁘게 필 시기라서, 지난 번엔 휠체어가 있어 볼 수 없었을 서울의 자연을 볼 수 있는곳이 어딜까 생각하다 내 차로 이동해서 삼청각에서 차를 마시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돌아서 마포에서 돼지갈비를 함께 먹기로 했다.
삼청각 일화당 2층 테라스에서 차를 마셨는데, 직원 분들이 도와주셔서 짧은 계단이지만 휠체어를 옮길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고 탈 때 마다 휠체어를 접어서 트렁크에 싣는데 그 무게가 상당했다. 같이 해도 이렇게 무거운데 평소에는 혼자서 다 하시는것 아닌가.
북악 스카이웨이에서는 서울에 이렇게 이쁜 산자락 길이 있는지 상상도 못했다며 연신 카메라를 누르셨다.
여행와서 서울 지하철에서 휠체어로 환승하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게 되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라도 아주 조금 마음의 빚을 갚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