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날 때에는 설거지
어린이들이 읽는 책을 성인이 읽으며 유치할까?
화가 났을 때 그 감정을 그대로 잡고 있으면 기운이 빠지고 우울해져요. 여러분을 화나게 한 일, 그래서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 일을 붙잡고 곱씹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도 어려워져요.
*케이티 헐리_'내 마음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_조연진 옮김_픽_2021
날씨가 추워지면 발가락이 종종 얼었다. 찬기운에 발가락이 양말 안에서 꼬물거리다가 도망갈 곳이 없어지면 추위에 꼼짝없이 포위당하고 만다. 남들에게는 웃긴 이야기이지만 강남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방에서 오르내리면서 재건축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였다. 한겨울, 집에서 종일 지내다가 발가락이 얼어서 동상 연고를 바르던 시기가 있었다.
고생은 겨울 한철로 끝나지 않았다. 여름이 되면 얼었다가 녹은 발가락들이 살살 간지럽다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소싯적 그때 말이야 추위와 싸우다가 내상을 입었다오. 더위가 찾아오니 그때가 생각나는구려'
얼었던 자신을 잊지 말라며 간질간질 나를 괴롭힌다. 안다. 많이 아팠구나.
최근에는 손가락이 얼었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가 찬기운에 그랬을까 아니면 찬물에 설거지를 하다가 그랬을까? 쩍쩍 갈라지는 손가락 틈과 살짝 얼었던 새끼손가락 옆이 가렵고도 아프다. 괜스레 맨손으로 찬물에 호기를 부린 것 때문인가 싶다. 아니면 눈이 퍽퍽 쌓이고 얼음이 녹지 않은 저녁, 길고양이들에게 사료에 캔을 비벼주고 간식을 주려고 짐을 풀다 보면 장갑이 이만저만 귀찮은 물건이 아니다. 맨 손만큼 일을 처리하는데 효율적인 것이 없다.
어린이들이 읽는 책을 성인이 읽으며 유치할까?
잠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거나 서점에서 계산할 때의 머쓱함만 건너뛰면 굳이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어른의 탈이 무거웠던 시기, 우리 마음속에는 그때 그 상황에서 풀지 못한 일의 당황스러움이 아직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종종 유아 그림책과 청소년 책들을 읽는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수집한다.
요즘도 화가 나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고 잘 해소되지 않아서 며칠을 마음속에 부여잡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보다 어른이라서 했던 많은 배려가 감사의 말이 아닌 황당한 요구들로 돌아올 때, 찬물로 확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넘어갔지만 새로운 황당함에 감정이 두터워지면 화가 난다.
화가 나면 마음이 꽁꽁 얼어버린다. 매섭게 얼어서 웬만한 따뜻한 온기가 불지 않으면 풀리지 않다가 때로는 갑자기 '피식' 하면서 확 녹아버리기도 한다.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같이 되어버린다.
눈이 펑펑 내린 어젯밤에 만들어놓은 눈 사람이 새벽의 찬공기에 잘 코딩이 돼서 단단해졌다. 이런 눈사람 같은 화 덩어리를 잘 녹이는 방법은 설거지이다. 고무장갑이 녹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물에 보글보글 거품을 가득 풀어놓고 신나게 닦아본다. 다시 또 그 상황에서 화가 나겠지만 마음이 계속 얼어있다면 사람이 자꾸 싫어진다. 그리고 또 괜히 다른 사람들과도 멀어진다. 감정이 투영되어버려서 비슷한 점만 눈에 띄어도 더 싫어진다. 일단 녹여야겠다. 매일 하는 설거지의 마지막에 화난 마음을 퐁당 추가한다. 그리고 녹여버린다. 어차피 설거지는 내일도 해야 하니까
화가 또 나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