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자취 생활을 하다 보니 장을 보는 저만의 규칙도 생겼답니다. 첫째, 배고픈 상태에서 장을 보러 가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면 전부 다 맛있어 보여서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의 식품을 사버리거든요. 둘째. 냉장고를 열어 현재 남아 있는 식료품을 파악해둔다. (중략) 셋째, 미리 메모지에 사야 할 것들을 적어간다.
<윤선혜 지음_저칼로리 도시락 60세트_부즈펌 2013>
매주 금요일, 낮에 퇴근하고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장을 보는 외국인 노부부를 본 적이 있다. 큼지막한 식빵 꾸러미, 시리얼, 과일, 통조림 등 한주에 한 번씩 꼭 금요일 오후에 장을 본다. 그리고 부엌 한가운데에 있는 팬트리(Pantry)에 넣어놓는다. 요즘은 부엌에 별도의 수납장을 두는 것이 흔하지만 오래전에 본 그들의 부엌에서 팬트리는 큰 자판기처럼 보였다.
그들이 하나씩 간식을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 외할머니 집의 어두컴컴한 '광(창고)'이 생각났다. 기와집 뒤편 작은 방, 아스라이 어두움을 살짝 가려주는 전구의 빛에 의지해 외할머니는 숨겨진 먹거리를 잘도 찾아내셨다. 가을에 말려놓은 곶감, 하얀 엿가락, 자식들 먹인다고 만들어놓은 전, 막거리 등 어둠을 뚫고 걸어 나오는 할머니의 두 손에는 먹거리가 계속 들려 나왔다. 시골이라 슈퍼가 없다 보니 외할머니의 광(창고)은 이런저런 주전부리가 있는 작은 슈퍼였다.
나는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는 편이다. 배가 꼬이거나 꼬록 꼬록 거릴 정도의 배고픔이 아니라 살짝 출출함을 느끼는 정도의 배고픔이 장을 나서기 좋은 시간이다. 마트를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면 반짝하고 눈에 들어로는 메뉴가 있다. 무엇이 진짜 먹고 싶은지 오히려 잘 분별이 된다.
한 여름, 태양이 이글거리는 낮 그리고 한 겨울, 손가락이 얼정도의 저녁 시간을 피해서 장바구니를 챙겨 나간다. 어제 온 마트 전단지에서 오려놓은 행사 상품 사진을 지갑에 접어 넣는다. 필요한 것을 작은 포스트잇에 적어가기도 하지만 전단 상품은 행사 가격이 적혀 있어서 한눈에 찜해놓은 물건을 찾기 편하다. 목록만 적어가면 물건마다 비슷한 제품을 들고 계산대로 가거나 행사상품 표기가 제대로 안되어있는 물건은 못 찾고 지나쳐버리게 된다. 비슷하게 생겨도 상표와 용량이 제각각이라서 물건이 다양하고 오래된 동네 마트에서는 전단지 사진과 비교하며 똑같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장바구니는 항상 현관 근처에 걸어놓는다.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 신발을 신으면서 장바구니를 외투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서 문을 나선다. 펄럭거리는 큰 장바구니는 끈에 돌돌 말려있거나 자주 쓰는 장바구니는 우산집 안에 들어가 있다. 바느질 잘하는 어머니의 아이디어로 알게 된 생활의 팁이다. 새 우산을 사면 우산 집은 사실 잘 쓰지 않게 된다.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 사라진다. 그래서 남아도는 우산 집을 가위로 반을 자르고 자른 면을 박음질하여 장바구니 주머니로 재활용한다. 반으로 자른 주머니는 장바구니 안쪽에 꿰매어서 고정시켜 주면 딱이다.
길고양이들도 사실 집이 필요하다. 그들의 연약함을 모를 때에는 잘 뛰어노는 녀석들을 보면서 길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 줄 알았다. 모두 입양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방법이겠지만 세상은 행복보다는 현실이니까 다른 방법들이 간구된다. 가만히 지켜보면 아파트 단지에서 생활하는 녀석들은 주로 지하실을 이용하는 것 같다. 주차장입구를 오르락거리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딘가로 연결된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기도 한다. 사람을 많이 무서워하지 않는 녀석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가까운 곳을 오간다. 마음 고운 주민들은 새끼 고양이들의 등장에 거처를 마련해 주려고 인적 드문 공터에 집을 만들어준다.
그래도 폭우와 폭설 같은 계절의 혹독함과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인지 약한 아이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길고양이 세계도 평화롭지는 않다. 옆 동네의 양아치 고양이가 나타나서 어슬렁거리면 내심 불안하다. 얼마 전에도 몇 달 전부터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덩치 큰 노랑이가 결국 건강하게 잘 뛰어 돌던 솜털 뽀송한 꼬맹이 녀석을 물어 죽였다고 했다. 인간 사회에서처럼 그런 녀석이 꼭 있다. 약한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괴롭히고 밟고 싶은 성향이 사람에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양이들 세계에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도 끊임없이 긴장을 하나보다.
장바구니 집을 만든 것처럼 길고양이들에게도 쏙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안전한 집을 만들어주고 싶다. 천으로 꿰매어서 만들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손바느질의 수고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동네에서 길고양이를 위해 만들어진 상자모양의 집들을 길을 걷다가 종종 발견한다. 하천을 따라 세워진 작은 육교들 아래, 공원 가는 길 언덕 수풀 안에, 상가 주차장 옆 공터 등 산책길은 어느새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시간이 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에 길고양이들의 작은 발걸음 소리는 부산히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 본 녀석들을 내일도 무사히 볼 수 있기를 안전한 집에 잘 들어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