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낭만이 산산이 무너졌던 지난 두 번의 파리여행을 잊고 얼마 전 다시 파리 앓이가 시작되었는데, 다음 달 아이들의 가을방학에 맞춰 비행기 표를 검색하니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저렴한 표가 있었다. 고민은 가격만 높일 뿐. 바로 결제했다.
지난달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헤밍웨이의 책을 내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했는데, 소개하기 위해 책을 읽고 또 읽고 낭독까지 하다 보니 상상 속 파리의 풍경에 푹 빠져 갑자기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지난 8월에, 두 달에 걸친 아이들의 긴 여름방학을 잘 견뎌낸 보상으로 얻어낸 주말 휴가가 한 번 있었는데(나의 휴가란 주말에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홀로 떠나는 시간이다), 그때 잠시라도 파리를 가고 싶었으나, 토요일에 갔다 일요일에 돌아오는 비행기는 없었다. 주말을 이용해 가려면 금요일 오후에 떠나 일요일 새벽같이 돌아오는 일정뿐이었는데 표도 무척이나 비쌌다.
오래 좋아했던 헤밍웨이의 파리 산문집을 내 유튜브 채널 <힐링 포레스트>에 소개했다
그래. 그럼 무리하지 말자. 파리는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접어두었던 마음이, 오늘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을 읽기 시작하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잠깐만, 가을방학 때 파리?? 나는 읽으려던 책을 덮어두고 라이언에어(유럽의 저가항공) 사이트에 들어가 표를 검색했다. 일주일 방학이어서 월요일 출발 금요일 도착 표를 찾아봤는데, 월요일 점심에 출발해, 금요일 밤에 돌아오는 기가 막힌 표가 딱 있었다. 심지어 가격은 편도에 100 즈워티, 우리 돈 3~4만 원 정도였다. 어머 이건 가야 해! 남편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빨리 표를 예매하라고 했다. 저가 항공이라 수하물 추가비용 등등 해서 결국 셋이서 왕복 30만 원 정도 나왔지만, 그래도 폴란드에 살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한국에서 가려면 셋이 30만 원으로 택도 없지만 그 긴 시간은 또 어떻게 낸단 말인가.
숙소를 어디에 잡을지 고민하면서 여행 책자와 지도를 펼쳤다. 아이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무조건 걸어 다니기 좋은 위치여야 한다. 처음에는 파리의 낭만을 내내 느끼기 위해 에펠탑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잡아 밤이고 낮이고 서성여볼까 했지만, 내가 아직 못 가본 미술관과 가고 싶은 곳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지도를 이리저리 확대하다 보니 공원이 보인다. 뛸르히 공원, 뤽상부르 공원... 그래! 공원 근처면 예쁘고 아이들과도 뛰어놀고, 한적하고 여유롭게 여행을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에는 호텔보다 개인이 운영하는 집을 빌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밥도 해 먹을 수 있어서 여행비를 많이 아낄 수 있다. 그래서 가정집 숙소 중 저렴하고 공원이 가까운 곳으로 예약을 했다.
값이 더 오르기 전에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좀 진정된 상태에서 <무정형의 삶>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오 이런, 김민철 작가가 파리 두 달 살기 중 한 달을 살려고 잡은 숙소가 바로 뤽상부르 공원 근처, 내가 예약한 숙소와 같은 동네였다. 한 달을 살며 담은 이야기 속에는 집 앞에서 찾았다는 맛있고 저렴한 피자집, 치즈가게, 좋은 오일파스텔을 살 수 있는 화방, 글을 썼던 카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미술관 등등 나에게 실제로 유용한 정보들이 가득 있었다. 이건 즐겁게 읽어볼 수 있는 에세이인 동시에 나에게는 생생한 여행책자이기도 한 셈이다.
표지도 제목도 이야기도 예쁜 <무정형의 삶>
나는 부지런히 구글맵을 찾아 하트 표시를 해두고 숙소에서 도보로 얼마나 걸리는지 확인했다. 대부분 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나보다 더 심한 파리앓이를 하던 작가가 파리에서 꿈을 이룬 이야기를 읽는 것은 정말 신이 났다. 작가 특유의 재미있는 문체에 혼자 킥킥대며 읽다가, 무언가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라도 나오면 밑줄을 그으며 메모했다. 다 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구글지도에 하트가 많아졌다. 이번 여행은 걱정 없겠는데!
단기 잡식성 애독가라 책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 경우가 드문 나인데, 이 책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20년 넘게 파리앓이를 했던 그녀가 퇴사하고 두 달 동안 살았던 경험은 어땠을까. 마지막에 그녀는 어떤 마음을 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그래서 짬나는 대로 책을 읽어 며칠 만에 에필로그까지 꼼꼼하게 다 읽었다. 그리고 끝까지 읽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에 작가는 말했다. 모든 것은 우연의 축제였다고. 작가는 새로운 동네에 처음 와서 작은 골목길을 거닐었을 때 아주 좁은 길 위에 현지 주민들이 자신의 소박한 물건을 내어 온 벼룩시장을 발견했다. 따스한 햇살에 바람에, 담벼락에 걸린 옷과 자신의 동화책을 파는 아이들과 팬파이프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마치 동화 속 같은 그곳을 다시 보고 싶어 재차 찾았을 때 그곳은 아무것도 없고, 햇빛조차 없는 음산하기까지 그저 한 골목이었다고. 이렇게 그저 여러 우연이 겹쳐서 한 순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니, 이 책을 읽고 똑같은 파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라고. 작가가 말한 그 어떤 것도 믿지 말고, 자기만의 지도, 자기만의 여행을 만들어보라고.
작가가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그 당부의 말이 담겨있는 에필로그까지 끝까지 읽어낸 나에게 고마웠다. 이 책은, 20대 초반부터 파리의 낭만을 품은, 20년 이상의 직장생활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첫사랑을 향해 날아온 파리의 찬사였다. 내가 떠날 여행은, 우선 작가와 전혀 다른, '다섯 살과 일곱 살의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엄마'의 여행이다. 아마도 집에서 짐을 싸는 것부터, 애들을 데리고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공항버스를 타고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오는 것부터가 난관일 것이다. 좋아하는 미술관에서 하루종일 머물지 못할 것이고, 파리의 10월 말이면 칼바람이 쌩쌩 불고 날도 흐릴 것이다. 예쁜 카페에 들어가 하염없이 글을 쓰거나 커피를 마시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만의, 아니 우리만의 파리 여행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아이들은 집에서 빈둥대며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데, 어쩌면 나의 욕심으로 잡은 파리 여행이다.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 명백히 그렇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나는 이 여행을 잊지 못할 우리만의 여행으로 결국은 만들 것이다. 처음 아이들을 차에 태워 머나먼 여행을 떠났던 부다페스트와 빈 여행도, 그보다도 더 멀리 떠났던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 여행도 그랬다. 그때 아이들은 보트를 타고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야경을 보며 섬 위에 보석이 떠다니는 것 같다고 감탄을 했고(그게 무슨 건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할슈타트의 호수에서는 사람에게 겁 없이 다가오는 백조들에게 빵조각을 주고 한참을 놀며 그게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여러 추억을 가득 쌓아왔고, 나는 꿈꾸던 곳으로 두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오가며 엄마로서 또 성장했다.
이번 파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2년 전, 지금보다 더 어렸던 아이들을 데리고 쌍둥이 유모차를 밀며 가서 진탕 고생하고, 미술관은커녕 디즈니랜드에서 이틀이나 보내고 온 그때와 또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겠지. 두근두근 D-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