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미정 Sep 22. 2022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꿈은 이루어진다

17년 전의 소망이..

2005년, 대학생 때 스위스 그린델발트 갔었다.

운 좋게 친언니가 스위스에서 결혼해 살고 있던 덕분에, 방학이면 스위스에 가서 한 달을 보내곤 했었다. 아나운서 취업에 떨어지거나 실연을 당하고 마음 추스를 곳이 없으면 언니에게 달려가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때  '자연은 최고의 의사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스위스의 자연은 아름다웠고, 거대했고, 압도적이었다. 혼자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인터라켄, 그린델발트 등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린델발트 가는 날은 구름이 가득했고, 비가 내렸다. 책 속 사진에서 워낙 예뻤던 곳이어서 날씨가 궂어도 예정대로 갔다. 안개와 구름이 자욱해 주변 산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끔 구름이 빈틈을 보일 때면, 그 사이로 거대한 산맥이 보여서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곳에 오면 꼭 피르스트(First)에 가는 케이블카를 타라고 했는데 승강장에 사람이 없었다. 매표소 앞에 놓인 팸플릿을 보니 아름다운 산 정상에 파아란 호수, 백두산 천지와도 견줄 수 없이 이 아름다운 모습은 아무리 안개가 자욱해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절경이었다. 케이블카를 탔고 20-30분을 타고 3000m가 넘는 정상에 올라갔다. 아쉽게도 가는 동안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까이 가면 조금이라도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정상에 내렸다.


사진으로만 봤던, 피르스트 정상에 있는 Bachalpsee 호수/ 출처 kr.trip.com


사람들은 없었고 케이블카를 타는 건물을 나선 뒤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1-2m 앞도 보이지 않아 한 발 한 발 아주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앞에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보다는 이러다 어디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조금 더 걸어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고, 결국 나는 곧 내려왔다. 정말, 정말, 너무도 아쉬웠다.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이랑 꼭 다시 와야지!'


굳게 다짐했었다. 아름다운 스위스 여행을 하며 행복했지만 이 감동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고 홀로 외로웠던 시기였기에, 꼭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올 것을 다짐했었다.




2022년. 폴란드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 집에 갔다. 멀리 살아서 자주도 못 보지만, 코로나까지 더해져 4년 반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전과 달리 나는 네 살, 여섯 살인 딸 둘과 함께였다. 주재원인 남편은 말로만 듣던 대로 매일 야근에 주말까지 일하느라 어디 함께 다닐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생 때 돌봐주던 스위스 조카들은 스무 살, 열일곱 살이 되어있었고, 늦둥이 막내는 귀여운 일곱 살이 되어있었다. 복작복작 언니 집에서 한국말과 영어가 오가며 지지고 볶다가, 언니가 선물이라며 예약해 준 툰(Tune) 호숫가의 숙소로 함께 2박 3일 여행을 갔다. 툰 호수는 인터라켄에서 서쪽에 있는 호수다. 통유리 창밖이 바로 호수여서 굳이 관광을 하러 어디 갈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닝커피를 마시고, 햇살을 받으며 요가도 하고, 아이들과 춤도 추고, 다가오는 오리에게 먹이도 주었다.


마치 합성같은 툰 호수의 풍경


게으르게 이틀을 보내고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다시 언니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쉬웠다. 언니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니 여행욕구가 별로 없었지만, 나는 가장 아름답다는 나라 '스위스'에 와있는 여행자였다. 구글 지도를 열었다. 대학생 때 여기저기 다녀봤던 터라 낯익은 지명들이 보인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그린델발트' '피르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아! 그래 여기! 여기였어! 꼭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


언니는 다음 날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아이들과 기차 타고 여기 들렀다 가겠다고 말하고 그린델발트의 피르스트 케이블카 타는 곳 바로 앞에 있는 곳에 숙소를 예약했다. 다행히 그때는, 유럽은 코로나 규제가 풀렸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직인 때여서 여행객도 적고 숙소 예약도 수월했다.


다음 날,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타고 30여분 만에 그린델발트에 도착했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기차역 근처가 아닌 케이블카 근처에 숙소를 잡은 탓에 1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야 했는데, 업어줘, 안아줘 하며 보채는 어린 두 아이들에, 세 명의 1박 2일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는 기가 막혔고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5월이었는데 눈 덮인 산들이 서로 하늘에 높이 닿겠다는 듯 줄지어 서있었고 하늘은 파랬다. 이건 마치 영화에서 완벽한 풍경들을 모아 교묘하게 합성한 풍경 같았다. 분명히 와 본 곳이었는데, 완전히 처음 온 곳 같았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 봤던 거였구나.


그린델발트 마을 풍경


첫날은 저녁 무렵에 도착해서 푹 쉬고 그다음 날 점심 무렵 아이들과 케이블카를 탔다. 평일이어서인지 한산했고, 정상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데 다행히 우리 셋이서만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철없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면 어디서든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데리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휴~ 한숨 놓으려던 순간, 한 아저씨가 부랴부랴 올라탔다. 이런. 이렇게 한산한데 바로 뒤에 꺼 타시지 굳이 왜... 나는 케이블카를 처음 타는 아이들과 신나게 떠들며 올라갈 생각에 신이 났다가 김이 샜다.


한참을 정적 속에서 올라갔다. 그렇지만 그 풍경은 절대 침묵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아이들에게 "진짜 멋지지?" 하며 속삭이자 아저씨가 "It's beautiful!" 하며 운을 뗐다. 너무도 공감했던 터라. 정말 아름답다고, 믿을 수 없는 풍경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만년설이 덮인 산들이 거대하게 펼쳐져있었고, 하늘에는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아저씨는 그저께까지 안개가 자욱했고 내일 다시 비가 올 예정이라며 나에게 "You are lucky!"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신이 나서, 내가 거의 20년 전인 대학교 시절 왔을 때,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것도 못 보고 꼭 다시 오리라고 다짐했는데 그게 오늘이라고 말했다. 이 풍경을 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거구나.


피르스트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하늘을 날기에 좋은 날씨라고 했다. "하늘을 난다고요?" 했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낭을 보여주면서 이 속에 패러글라이드가 있다고 했다. "Really???" 우와, 이 아저씨 동경의 대상이다. "By yourself???" 흥분해서 물으니 패러글라이딩 자격증이 있어 혼자서 어디서든 날 수 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꾸었던 나는 아직도 패러글라이딩과 스카이다이빙에 대한 강한 욕구가 남아있다. 너무 멋져서 물어보니 자격증 따는 과정을 알려주었고, 나는 아이들이 있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전문가와 함께 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으니 인터라켄에  지인이 하고 있다며, 필요할 때 연락 달라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메일 보낼 때 피르스트 케이블카에서 만났던 사람이라고 알려주면 자기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까만 패러글라이딩 배낭을 메고 우리보다 한 정거장 전에 먼저 내렸다. 정말 멋지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낯선 사람과 낯선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다. 불과 20분 전 아저씨의 탑승을 언짢게 여겼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정상에 내렸다. 공기가 꽤 차가워서 가져온 외투를 입고 아이들에게도 입혔다. 내리자마자 펼쳐진 하얀 눈. 아래에서는 우러러봤던 그 거대한 산들이 지금은 내 시선 높이에 펼쳐져있었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었고, 나는 이 차갑고 청량한 공기를 폐 속 가득히 들이마셨다. 우와.. 믿을 수 없어.. 계속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눈을 보고 신이 나서 만지고 밟으며 놀았다. 뜨거운 해에 달궈져 다 녹아버린 초콜릿을 눈 사이에 넣어두었다가 같이 꺼내먹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두 아이는 내게 동시에 "엄마, 업어줘~" "엄마, 안아줘~"하면서 보채기 시작했다. 아직도 잘 걷지 않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들이어서 늘 쌍둥이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는데, 여긴 유모차도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정말 난감했다. 나는 사진에서 봤던 그 호수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주변에 물으니 이곳에서 50분을 걸어가야 한다고 했고, 눈이 녹아 질퍽일 수 있어서 적절한 신발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눈 만지느라 정신없는 아이들과 셀카 찍느라 정신없는 엄마


휴...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들과 50분 하이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호수는 포기하자. 여기 이 풍경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하다! 다행히 바로 주변에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라는 스카이워크 같은 코스가 있었다. 산의 절벽 옆으로 철로 된 난간 다리를 설치해, 한 바퀴를 쭉 걸을 수 있는 코스였고 15분 정도 걸린다고 쓰여있었다. 보기에도 조금 무섭긴 했지만 이 짜릿함을 포기할 내가 아니다. 아찔한 높이, 눈앞에 펼쳐진 산들, 밑에는 구멍이 뽕뽕 뚫려있는 난간. 아래를 보면 현기증이 나서 멀리 바라보며 걸었다. 아이들은 조금 무서워하면서도 신기하게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나보다 덜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 멋진 풍경과 아이들을 영상으로 담으려고 핸드폰을 꺼내면, 저 나락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릴 것만 같아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셋이 손을 꽉 잡고 우리는 무사히 도착지점까지 왔다.


First Cliff Walk


도착 지점은 케이블카가 있는 건물 레스토랑과 맞닿아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먹을 치킨 돈가스와 감자튀김, 내가 먹을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카푸치노도 주문했다. 맑고 시원한 공기, 아찔한 절경 속에서, 공포의 트래킹을 마치고 난 후 먹는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아이들은 감자튀김을 까마귀에게 주며 무서워하면서도 재미있어했다. 햇빛이 뜨거워 둘째가 내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장난을 쳤다. 이런 배경 속에서 카푸치노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나니, 이곳에 다시 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대학생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와야지!'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오는 꿈은 이뤘지만 남편과 못 온 것은 좀 아쉽네..'하고 생각하던 찰나,


'아니, 남편보다 더 많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과 함께 온 거잖아??? 나의 찐사랑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낫다. 이렇게 나의 꿈이 이루어지다니. 대학생 소녀의 꿈이, 두 딸과 함께 이루어지다니. 두 아이를 차례로 업어주고 비위를 맞추어주느라 힘들었지만 더없이 행복했다. 가슴이 벅찼다. 이 믿을 수 없는 풍경 속에, 찐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과 함께, 웃고 안고 떠들고 있는 순간이 가슴 벅차게 감사했다. 더 원할 것 없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 시간에도 일만 하고 있을 남편에게 멋진 사진들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여보 덕분에 여자 셋이 호강하네.

다음에는 우리 둘이 호수에 꼭 가보자!"


피르스트 정상의 모습


이전 03화 스위스 이젤발트에서,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