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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Sep 26. 2022

스위스 이젤발트에서,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구차한 변명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의 코발트빛 호숫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현빈과, 유람선을 타고 그 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치유를 받았던 손예진의 그 모습. 아름다운 풍경과 애절한 사연이 깃든,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배우 손예진을 워낙 좋아하는 터라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들은 거의 보는 편인데, 사랑의 불시착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영된 지 한참 지나 작년 가을에 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면 1년 정도 묵혀두었다가 한참 후, 시간이 생기면 정주행 하는 편이다. 뒤늦게 드라마를 보고 그 로맨스와 스위스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가시지 않았을 때 스위스에 사는 친언니 집에 방문하게 되었으니, 드라마 촬영지가 어디였는지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장면


그곳은 이젤발트(Iseltwald)였다. 그리고 언니와 함께 여행 갔던 툰(Tune) 호수의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툰 호수는 인터라켄(Inetlaken)을 중심으로 서쪽 호수였고 이젤발트는 동쪽 호수인 브리엔츠 호의 남쪽 호숫가 마을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차로 40분 정도 거리였고, 가는 길이 모두 호숫가여서 무척 예쁠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언니가 운전을 하니 맘대로 이동을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다. 툰 호수에 여행 오기 전까지 언니는 바젤에서 무척 바쁘게 일을 하다가 겨우 여기에 와서 한숨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한적한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요가를 하고, 주변을 뛰다 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계속 같이 있으면 정신이 없기도 해서 애들을 다 데리고 나갔다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언니, 차 좀 빌려주라. 내가 노아랑 애들 다 데리고 나갔다 올게. 좀 쉬고 있어."


쉬고 있으라는 말로 마무리했지만, 20%의 배려와 80%의 여행욕구로 한 말이었다. 운전 경력은 내가 훨씬 길지만, 언니는 내가 낯선 나라에서 운전하는 것이 불안했는지 차라리 사비나가 운전을 해서 넷이 다녀오라고 했다. 사비나는 언니가 스물여섯에 낳은 나의 첫 번째 조카로, 내가 대학생 때 스위스에 오면 사랑스럽게 돌봐주던 아가였다. 이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이 되어 얼마 전 운전면허를 땄고, 차가 없어 늘 운전할 기회를 엿보던 참이었다. 사비나도 신이 나서 차 키를 거머쥐고 시동을 걸었다.


사비나와 내가 앞에, 수아와 주아가 뒤에 타고,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다. 아이들은 금세 잠들었고 사비나와 나는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며 아름다운 호숫가를 달렸다. 코발트 빛 호수, 이상적인 초록빛의 산들, 파란 하늘... 스위스 사진엽서에서나 보던 풍경들이 창밖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기에 뚫어져라 그 비현실적인 풍경들을 바라보고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반가운 이젤발트 이정표와 처음 마주한 호수 모습


사비나. 이 아이가 지금 나의 둘째보다도 어렸을 때, 내가 스위스에 놀러 오면 데리고 다니면서 그네도 태워주고, 젤리를 사주고, 한국말을 가르쳐주곤 했었다. 사비나가 한국에 놀러 오면 워터파크며 놀이동산이며 동대문이며 열심히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이 아이가 커서 내 아이들과 놀아주고 운전을 해주며 나를 보좌하고 있으니,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이토록 감격스럽고 보람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하는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세월이 좋구나'라는 말이 이런 뜻이겠구나 짐작했다. 후후..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나이 드는 게 싫지 않게 느껴졌다. 이 감개무량한 마음을 사비나와 나누며 이젤발트에 도착했다.


호숫가에 다다르기 전부터 위에서 바라본 호수는 완벽한 코발트빛이었다. 호숫가 입구에 주차를 하고 아이들과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사람들은 없었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들판에 꽃이 피어있었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평온한 5월이었다. 아이들은 꽃을 바라보고 소에게 말을 걸며 더디게 한 걸음, 한걸음을 내디뎠다.


평온한 이젤발트의 풍경


호숫가에 다다르자 드라마 속 장소가 보인다. 현빈이 피아노 치던 그 나무 갑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연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 뒤로 쌍쌍이 줄을 서있었다. 나는 갑자기 조카에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드라마 촬영지를 쫓아다니며 사진 찍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 말을 하는 것이 더 웃기고 부끄러웠다. 다 큰 조카는


"Yeah, right."


하면서 웃기다는 듯 반어법의 뉘앙스로 대답했다.


정말로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다닌 적은 없었다. 이 글에다 왜 또 해명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뭘 찍었다더라, 누가 다녀갔다더라 하는 것에 관심 둔 적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 압도적인 풍경은 '스위스'였고, 잊히지 않았고, 와서 보니 영상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줄 서서 사진 찍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찍어야겠어."


조카가 키득키득 웃었다. 조카 앞에서 솔직할 수 있다는 것, 이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어줄 조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어서 우리는 줄이 조금 짧아질 동안 아이들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러보는 동안 그나마 조금 있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호수 색은 더 환상적으로 변했다. 병풍같이 늘어선 호수 건너편의 산들은, 과장된 필터를 넣은 것 같은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서로 예쁘게 사진에 담아주었다. 바로 그때, 드라마 속 손예진이 탔던 그 스위스 유람선이 우리 앞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나는 이곳에서 연인이 아닌 자식과 찐한 사랑을..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줄을 서서, 포토존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사진을 남겼다. 우리 앞에 있던 한국 연인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여러 장을 멋지게 찍어주고는, 우리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곳엔 대부분 연인들이 있었고, 우리만 아이들과 함께 온 시끄러운 가족이었다. 먹다 남은 빵을 오리에게 부숴주려는 아이들, 겁도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호수에 빠질까 두려워 사진 찍는 동안에도 잡으러 다니고 난리를 쳤지만, 예쁜 두 딸과, 사랑하는 조카와 찍는 가족사진은 정말 뜻깊었다. 리정혁이 피아노를 치던 그 로맨틱한 촬영지에서 우당탕탕 가족사진을 찍게 될 줄이야! (물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카에게 내 독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조카에게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했다. 반 한국인인 조카는 한국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 한국 드라마도 꽤 보는 편인데 이 드라마는 아직이었다. 폴란드 집으로 돌아와서 조카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벌써 사랑의 불시착을 정주행 하고 있었고, 웃겼던 포인트와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과도 공감할 수 없는 로맨스 드라마를 조카와 공감할 수 있다니! 우리 언니는 사비나가 대학교 기말고사 기간에 드라마 때문에 폐인이 되었다고 했다. 이모로서 조금 미안해졌다.


현빈이 피아노 치던 그곳에서 우리도 사진을


이젤발트의 포토존에서는 조카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같은 메신저를 쓰지 않아서 사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조카가 한국에 있는 대학교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하는데 카톡 계정이 필요해 만들었다며 연락이 왔다. 그래서 우리는 5개월 정도 묵힌 사진을 서로 주고받았다. 스위스 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이젤발트에서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카톡을 보내는 조카의 프로필 사진은, 그 이젤발트의 포토존에서 조카와 우리 둘째가 함께 눈가에 브이를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일심동체가 된 듯 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귀여운 두 사람의 사진. 문득 내가 지금의 조카 만했던 대학시절, 어린 조카와 사진을 찍고 싸이월드에 도배를 하던 생각이 났다. 대를 잇는 로맨스. 사랑의 불시착보다 더 애틋하다.


꼬꼬마 때부터 돌보던 조카 사비나와 나의 둘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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