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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May 03. 2023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비긴 어게인>

살아 있고 볼 일이다

몇 해 전 TV프로그램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 엄청난 대리만족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바야흐로 코로나의 시작으로 고립되던 시기였으며, 나의 두 아이들은 이제 막 세 살과 다섯 살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어린이집 폐쇄와 함께 시작된 두 아이 독박 육아. 나도 그렇게 오랜 독박육아는 처음이어서 외로웠고, 괴로웠고, 우울했고, 분노했던, 나도 처음 겪는 멘붕의 시절이었다. 그때 우연히 TV에서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유럽의 멋진 도시들을 돌며 버스킹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코로나 전에 촬영된 것이어서 자유롭게 유럽의 도시를 활보하는 가수들과 그들의 거리 공연을 감상하는 현지인들, 여행객들, 그리고 전율이 돋는 뮤지션의 아우라와 멋스러운 유럽의 풍경...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게는 꿈만 같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갑자기 그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폴란드에 온 지 1년을 넘어서고 긴긴 겨울이 드디어 끝나 여행에 시동을 걸던 참이었다. 마침 아이들이 5월 첫 주에 일주일간 방학을 하게 되어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던 부다페스트로 떠나기로 했다. 남편은 휴가를 낼 수 없었고, 부다페스트는 주말에 다녀올 거리는 아니어서, 나는 차를 가지고 1주일간 독박육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행은, 처음에는 늘 호기롭게 출발하지만 현지에서는 "내가 미쳤지"하며 후회를 하고, 돌아와서 시간이 흐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는다. 그래서 고생을 망각하고 또 떠난다. 아무튼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부다페스트로 가기로 결심. 우리 집에서 부다페스트는 차로 운전해서 7시간 반이 걸린다. 하루에 가기는 나도 아이들도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가는 경로에 있는 체코 브르노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은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블라바에서 잠시 쉬었다가 헝가리에 입성하기로 했다.


브라티슬라바의 프리메이트 궁전과 구시청사, 오페라 극장


브르노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점심 무렵에 브라티슬라바로 향했다. 이곳에 살았던 한국인 지인이 '거기 별로 볼 거 없어요. 올드 타운 밖에'라고 해서 별 기대 없이 갔다. 올드 타운 근처에 주차를 하고 구시가지 광장을 향해 걸었다. 4월 말까지 계속 쌀쌀했던 날씨는 오늘에서야 따뜻해졌고 하늘은 파랬다. 광장을 향해 들어서자 14세기에 지어졌다는 연핑크빛의 프리메이트 궁전과, 시계탑의 역사가 느껴졌던 구시청사, 분수가 있는 메인 광장, 오페라 극장이 차례차례 보였다. 유럽 현지인들의 투어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여행객들로 붐볐다. 기대 없이 왔는데 위대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멋진 곳이었다. 뒤쪽으로 푸른 공원이 보여 걸어갔다. 가는 길에 펼쳐진 기념품 구경도 하고, 브라티슬라바를 기념하는 마그넷도 하나 샀다. 아이들은 신나게 비눗방울을 불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좀 더 걷다 보니 신비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 나는 홀린 듯 그곳으로 더 다가가 보았다.


외관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핸드메이드 기념품 숍과 브라티슬라바의 모습을 담은 마그넷


공원 분수대 앞에서 청바지에 파란 후드티를 입은 한 남자가 키보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애잔하고 감미로운 연주가 울려 퍼졌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서 그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불다가 그 남자 뒤에 있는 분수대를 보더니 재빨리 그 위에 올라앉았다. 비눗방울 통에 물을 넣었다 비웠다 하면서 신이 났다. 조심하라고 앞으로 넘어지지 않게, 옷 젖지 않게, 비눗방울 쏟지 않게 조심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흥분한 아이들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신나게 놀아라. 좀 젖으면 어때. 그러고는 나도 뒤로 물러나 이 남자의 연주에 몰입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연주라고 해야 할까. 곡도 그의 손도 애절했다. 귀 기울여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시려오는 동시에 아주 부드럽게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사연이 있는 연주 같았다. 한참을 넋 놓고 들었고, 다행히 아이들은 물놀이에 신이 나서 평소와 달리 꽤 오래 나를 내버려 두었다. 따뜻한 날씨, 낯선 곳의 이국적인 풍경, 초록색 공원, 황홀한 연주, 연주자 바로 뒤의 분수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두 딸들. 행복감을 느끼던 순간 문득 떠올랐던 문득 것은 이전에 내가 TV에서 <비긴 어게인>을 봤던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울고 보채는 두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답답한 아파트에 갇혀있었다. 그 와중에 TV를 보면서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보았으면, 저런 여유와 유럽의 낭만을 느껴봤으면'하고 간절히 꿈꾸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현장에 와 있고, 심지어 그때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두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 이 풍경 속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행복.. 하다. 그때 내가 바라던 행복, 그때 꿈꾸었던 그 장면 속에, 그것도 아이들과 함께 들어와 있다니.


연주에 몰입했던 거리의 연주자. 많은 이들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 뒤에 우리 딸들 >.<


사실 유럽에 살기 시작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거리의 연주를 많이 봐왔다. 아이들과 함께 구경하며 동전을 넣어준 적도 많았다. 하지만 비긴 어게인을 떠올리며, 내가 품었던 꿈을 이루었구나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남자의 그 애절한 연주 덕분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내가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아니 어쩌면 봄을 알리는 이 날씨가 한몫했을 수도. 어쩌면 브라티슬라바의 역사 깊은 풍경이 내 마음을 이미 흔들었는지도. 그게 무엇인들 뭐가 중요하랴.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낭만과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걸.


그 꿈을 꾸었던 그 시절의 나는 깊은 우울에 빠져 죽고 싶었던 순간이 꽤 많았다. 내 생애 중에서는 꽤 심각한 시기였는데 그때 나는 '오늘만 살아있자'라는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다. 그렇게 하루만, 하루만 하면서 살아냈는데, 불과 몇 년이 흐르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만큼 컸고, 나는 유럽에 와있고, 거리의 음악을 들으며 동전을 넣고 박수를 치며 그때의 꿈을 살고 있다니. 그때 살아있기를 정말,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살아있고 볼일이다. 살아만 있으면 삶은 다시 시작된다. Begi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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