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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28. 2022

느긋하고 꾸준히



이 학교에 발령 난 지 5년 차,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스포츠클럽 연습을 하고 싶다는 학급이 나왔다. 체육 부장은 어떻게 몸을 푸는지도 모르는 애송이 팀이다. 하지만 승부욕과 의지만은 대단해서 결승 경기냐고 물으니 예선이란다. 그늘 아래서 글을 쓰며 발야구 규칙은 아는 건지 애매모호한 경기를 구경한다. 상대 팀에게 “아무렇게나 차도 되지?” 묻고, 서로 “볼링도 못 치잖아”라고 비난한다. 빵빵 헛발질 하고, 남학생들은 자기 공은 잡을 수 없을 거라며 허세를 떤다.



하지만 이 아마추어 팀의 경기가 더없이 흐뭇한 것은 참여자가 없어 기권이 빈번한 우리 학교의 스포츠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준비까지 할 정도로 열심이기 때문이다. 강요된 열정은 의지를 퇴색시키지만(청소 하려는 순간 “청소해”라고 하는 부모님의 잔소리) 자발적인 의지는 자외선 지수 8의 햇빛에도 운동장을 내달리게 만든다. 우리가 출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참여해야 하느냐던 남학생들이 한 시간 내내 수비를 하고 공을 굴려준다. 헛발질 한 번에도 스물 세명이 한마음으로 넘어갈 듯 웃는, 즐거운 추억을 남긴다.



시를 읽고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는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해서 성적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수줍게 꺼냈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주위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고, 스스로도 얼마 하다 포기할 줄 알았단다. 낯설고 두려운 일이라 자율학습을 할 때도 엉덩이가 근질거려 혼났다고. 그 시간을 버티는 게 목표였는데 어느새 자기도 옆 친구들처럼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더라고. 그는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공부해왔던 친구들을 따라잡기 어려워서 한 때 슬럼프를 겪었다고 했다.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때 누군가의 “남과 너를 비교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라는 응원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어제의, 과거의 자신보다 발전하기 위해 공부했다.



그 학생의 발표는 많은 학생들을 자극했다.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친구, 다짐은 했으나 실천을 못해서 성적이 떨어진 학생, 목표가 없어서 결실을 얻은 친구를 보며 왠지 모를 죄책감과 언짢음을 느끼는 학생까지. 그는 두려움을 극복한 경험을 통해 누구에게든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모두 진심어린 박수와 위로를 받았다.





2월부터 시작한 런데이 기본 트레이닝 코스를 어제 끝냈다. 녹음된 트레이너 목소리가 의지를 강제로 주입하는데, 달리다보면 은근히 도움이 됐다. 쉬지 않고 30분을 달리기 위한 스물 네 개의 코스 중 25분을 쉬지 않고 뛰는 스물세 번째 트레이닝에서 “고통은 즐기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입니다. 고통을 넘어 달리세요.”라는 말이 나왔다. 언제나 긍정적인 말만 하던 프로그램이라 의아했으나, 맞는 말이다. 고통은 지나고 나면 미화되곤 하지만 그것을 겪는 현재에는 고통일 뿐이다. 아무리 의미를 갖다 붙이려 해도 소용없다. 새롭고 낯선 일에 도전하는 순간 고통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걸 피하면서 능숙해지란 불가능하다. 운동은 일종의 스트레스라고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를 극복하며 성취감이라는 짜릿한 자극으로 바뀐다. 매일 뛰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고통에 부딪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는 경험을 통해 신체와 정신 기능이 성장한다. 다른 일을 하더라도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마음의 자산이 생기는 거다. 경험하여 이뤘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진짜배기다.



고등학교 생활이나 임용고시 수험생 과정을 떠올려본다. 무척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이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아니오. 열아홉과 스물넷 때는 쉬지 않고 나와 남을 비교했고 경주에서 이기려고 앞만 봤다. 과거의 나는 미숙하고 멍청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나는 코를 박으며 공부하면서도 유달리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 똑똑한 학생이었다. 성적만 아니면 자신 있고 당당했으며, 말까지(!) 잘했다. 과거의 나는 싸워 부술 대상이 아니었다. 함께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친구보다 더 좋은 점수를 맞을 필요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하고, 남은 인생을 보낼 때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를 따져 얻기 위해 묵묵히 하루하루 도전하면 되는 거였다. 물론 입시 제도나 부모님의 압박으로 성적에 초월하기란 어려웠겠지만 현실에 이미 거하게 치여 고통받던 나를 덜 괴롭힐 수는 있었을 것이다.



지금을 즐기라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서점에 즐비한 빤한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거하게 성공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성공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매일 엄청난 공부를 하면서도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불안했던 과거의 나를 이제라도 위로하고 싶을 뿐이다. 그때의 경험으로 무슨 일이든 진득하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도서관에 매일 아홉시면 출근 도장을 찍는 근면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야박한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며 견뎌낸 덕에 살아남았다.



당신 앞의 시간이 지루하고 울적하기만 한데 스스로 그걸 버틸 힘이 없다고 느낄 때. 자려고 누우면 세상의 온갖 우울함과 불안, 걱정이 해일처럼 밀려든다면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고통도 없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나 미래를 좌지우지하지 않지만 오늘을 바꿀 수는 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봤으면 한다. 고통을 받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일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은 눈에 띠기 마련이니까.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함께 현재를 버텼으면 한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에서 주인공들은 거대한 힘에 맞서기위해 손을 잡고 고통을 견딘다. 손을 잡는다고 한 명 한 명의 고통이 작아지지 않는다. 그저 함께 견딜 뿐이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약하고 또 약하니까, 옆 사람에 기대보는 것이다. 그런 약점을 꺼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면 어떤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느릿하고 꾸준하게 걷는 거다. 너의 초라함과 나의 부족함이 모여 오늘을 바꾼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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